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수흐바타르 광장의 동상과 칭기즈칸 기념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전체인구 350만 명 중 절반가량인 160만 명이 살고 있는데, 울란바토르 관광은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시작한다. 울란바토르란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며, '붉은 영웅'은 독립 영웅 수흐바타르(Damdinï Suhbator)를 기리는 이름이다. 1911년 외몽골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지금의 울란바토르는 '니이슬렐 후레헤'라고 했는데, 니이슬레 후레헤란 ‘큰 울타리’란 뜻으로서 몽골의 라마교 총본산이자 최대의 사원인 간단 사원(甘丹寺)의 담장 주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청나라 지배를 받고 있던 외몽골은 1911년 7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복드 칸(Bogd Khan)을 대칸(大汗)으로 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복드 칸을 지지하는 러시아와 협의 끝에 1915년 6월 러시아와 몽골의 국경도시인 캬흐타에서 중국과 협정을 맺고 몽골의 자치를 인정했지만, 러시아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붕괴하자 태도를 바꿔서 다시 외몽골을 점령했다. 몽골은 독립을 위하여 꾸준히 러시아와 관계를 유지했는데, 복드 칸은 1920년 러시아혁명 때 반 볼셰비키 파인 적군(赤軍)과 우익의 백군(白軍)이 내전 중에 백군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과 함께 중국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수흐바타르는 유목민을 선동하여 몽골인민당을 창설하고, 1921년 7월 적군(赤軍) 레닌의 지원을 받아 백군 세력을 추방하고, 중국으로부터 정권을 접수했다. 하지만, 복드 칸은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고,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국가 주석이 되고, 수흐바타르는 국방부 장관이 됐다.

수흐바타르 동상
수흐바타르 동상

몽골인민당의 지도자 수흐바타르는 몽골인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2년 뒤인 1923년 30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수흐바타르가 사망 후 그의 시신은 몽골의 국립묘지인 알탄올기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54년 수흐바타르 광장에 영묘가 세워지면서 동료 허를러깅 초이발산과 함께 영묘에 안장되었다. 우리의 광화문 광장과 비슷한 수흐바타르 광장에는 몽골의 건국 영웅 수흐바타르의 동상을 세웠는데, 이곳은 수흐바타르가 개선할 때 타고 있던 말이 오줌을 쌌다고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때 사람들이 이곳에 말뚝을 박아 두었는데, 도시계획을 하면서 그 말뚝이 발견되자 수흐바타르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칭기즈칸 기념관
칭기즈칸 기념관

1992년 몽골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면서 수흐바타르보다 칭기즈칸을 더 높게 평가하여 2005년 수흐바타르 광장을 칭기즈칸 광장으로 고치면서 영묘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칭기즈칸의 동상을 세웠다. 또, 2013년에 수흐바타르 광장을 ‘칭기즈칸 광장’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몽골인민당의 반발로 2016년 다시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환원할 정도로 그는 몽골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몽골인들은 칭기즈칸과 동격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데, 몽골 화폐에 얼굴이 들어가는 국가적인 영웅으로 대우하고 있다. 수흐바타르의 동상 북쪽에 국회의사당이 있고, 국회의사당 건물 앞에 칭기즈칸 기념관이 있을 정도이니, 수흐바타르의 위상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칭기즈칸 좌상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아들 오고타이 칸, 오른쪽에는 손자 쿠빌라이 칸의 기마 동상이 있다. 수흐바타르 광장은 울란바토르 최고의 랜드 마크로서 각종 국가행사와 문화행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시위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칭기즈칸 동상
칭기즈칸 동상

1893년 체첸칸의 가난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수흐바타르는 16세 때 후레헤와 러시아의 국경도시 캬흐타를 잇는 역전(驛傳) 마차의 마부로 일하다가 18세 때인 1911년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자 군에 입대했다. 1918년 전역한 후에는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植字工)이 되었던 그는 중화민국이 독립을 취소하자, 1920년 6월 몽골인민당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2016 아셈 회의 기념 탑
2016 아셈 회의 기념 탑

한편, 칭기즈칸(成吉思汗)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던 대칸으로서 그의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孛兒只斤鐵木眞)이다. '칭기즈'란 몽골어로 ‘위대한’ 이란 뜻이고, 칸은 ‘군주’, 보르지긴 (孛兒只斤)은 ‘회색 눈’이란 의미라고 하니, 아마도 아랍계 혼혈인 같다.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 카프카스, 러시아, 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권까지 정복한 후, 장남 주치에게 남서 시베리아에서 남쪽 러시아 땅 및 미래에 정복할 수 있는 모든 토지를 주고, 차남 차가타이에게는 중앙아시아와 서요의 옛 땅을, 셋째 오고타이에게는 서쪽 몽골 및 위구르, 나이만, 타타르, 중가리아를 주었다. 또, 세 명의 동생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 등에게는 내몽골 동부의 영토, 여진족의 영역 근처이자 옛 거란족과 이민족이 차지했던 지역을 분봉해 주었다. 이들은 ‘동방 3왕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1226년 몽골 서남쪽의 탕구트 왕국(西夏) 정벌에 나서면서 도중에 사냥하던 중 칭기즈칸이 탄 말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말에서 낙마사고로 1227년 66세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몽골로 옮겨졌으나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원사(元史)에 의하면 역대 몽골 칸의 매장지인 기련곡(起輦谷)에 묻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비밀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칭기즈칸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은 모두 살해되고, 매장 후에도 그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 1000마리의 말을 몰아 일대의 땅을 평평하게 밟아 다졌다고 한다.

몽골 전통음식 만두
몽골 전통음식 만두

울란바토르 시내는 그렇게 넓지 않아서 하루면 걸어서 구석구석까지 둘러볼 수 있는데, 몽골은 2000년대 이후 한류열풍과 몽골인들이 한국에 많이 취업하고 있어서 매우 호의적이다. 또, 한국인들이 여행객을 겨냥한 한국식당도 많아서 비빔밥, 불고기, 갈비, 제육볶음 같은 한식도 쉽게 맛볼 수 있고, 한국의 편의점 브랜드 CU도 300개소가 넘는다. 한국식 노래방, 찜질방, 피시방, 포장마차도 있다. 몽골인의 주식은 양·소고기·감자, 몽골식 만두이고, 채소와 과일은 거의 먹지 않는다. 특히 양철 우유 통에 양고기, 감자, 달궈진 돌과 소금을 함께 넣고 뚜껑을 닫은 뒤, 초원에서 통을 굴리면서 달가워진 돌의 열기로 고기가 익는 허르헉(Xopxor)이란 전통음식은 특별한 행사나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 내놓은 음식이지만, 관광객들은 흔하게 먹을 수 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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