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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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일요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 장병4묘역 413판 13706호 해병 채수근 상병의 묘소에 다녀왔다. 아직 시들지 않은 꽃다발들이 여럿 놓여 있었고, 그와 함께 훈련을 받은 1289기 동기들이 갖다 놓은 꽃다발이 있었고, 군대 내무반 그의 사물함에 있던 메모장과 필기도구와 기타 소소한 것들이 비를 맞지 않게 만들어진 유리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편지가 새겨 있었고, 죽은 뒤 자신이 천국에서 썼으리라는 가상의 편지가 새겨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었다. 비석 뒷면에는 2003년 1월 2일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여 2023년 7월 20일 경북 예천에서 순직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비석 옆면에는 2023년 보국훈장 광복장이 추서되었다고 새겨져 있었다. 그것으로 그의 죽음은 정리된 것일까?

한참 바라보고 고요히 생각하여 보았다. 비약이긴 하지만, 이 때 내 맘 속에 채수근 상병과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단원고 학생들과 이태원 할로윈 축제 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우리의 개인과 사회양심을 재어보는 잣대요 저울이며 비춰보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두 이름이 크게 맞대어 나타났다. 해병대령 박정훈과 대통령 윤석열이었다. 한 이름은 숙연하고 자랑스럽고 산뜻하고 옷깃을 여며 다시 입에 올려 부르며 예배하게 하지만, 다른 한 이름은 다시 생각하거나 부르고 싶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한다. 이 때 양심이란 말이 가슴을 세게 쳤다.

양심, 양심이 무엇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산다면 양심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한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양심, 그것은 ‘하느님이 돌보시고 이끄시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에 따라서 다른 말로 바꾸어 불러도 될 것이다. 아무튼 양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활력소다. 그것이 파랗고 팔팔하게 살아 있다면 온 뫔 전체를 빛나고 당당하게 이끌어 놀라운 삶을 살게 하지만, 그것이 쭈그러졌거나 구멍이 났거나 더러움으로 덮여버렸다면 온 뫔이 축 처지고 생기가 없고 무기력해진다. 나는 최근에 이 양심이 파랗게 살아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듣고 그 행동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고마움과 생생함을 주는 사람을 매스컴을 통하여 보았다. 다시 써보지만 그 이름은 박정훈이다.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 그를 그답게 만든 양심이 어떤 외부의 영향으로 구겨지는 슬픔을 맛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이 때 세상을 떠난 채 상병이 왜 이렇게 크게 온 사회를 뒤흔드는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그와 비슷한 사건들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미미한 것으로 처리될 수도 있었을 이 사건이 왜 유독 큰 문제로 떠오르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 이 시대를 시험하는 시험지요, 이 시대의 양심을 재어보는 잣대요 저울로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그 시험 저울의 한 면에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국가권력이 올려져있고, 한 쪽에는 대령 계급장을 단 한 군인과 그를 응원하는 보이지 않고 소리도 별로 없는 듯이 지켜보는 것들이 올려져있다. 올바른 일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덧씌워진 항명죄로 재판을 받는 그를 거대한 국가권력이 합심하여 어렵게 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무죄로 풀려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있다고 판결이 되든, 아니면 무죄가 되든 그가 던진 양심의 빛은 맑고 밝게 빛날 것이다. 설령 국가권력이나 언론이나 여론이나 법해석과 법적용을 통한 집단테러로 그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이 난다 할지라도 그는 살고 그를 어렵게 한 것들은 시들한 삶을 살 것이다. 그이의 당당한 모습을 보라. 그러나 그를 죄 주겠다는 직위를 가진 사람들, 그들이 최고통치자든, 장관이요 별을 몇 개씩 단 사령관이든 그들의 얼굴에서 빛을 느낄 수가 없다.

가만히 생각하여 본다. 이렇게 고난을 받는 양심, 팔팔한 양심 때문에 고난을 받는 사람은 고난으로 그 자신도 빛나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꺼져가는 양심을 살리는 일을 한다. 그가 그렇게 어렵게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지만, 그것으로 놀랍게 사회양심은 뽀송뽀송 살아나며 파릇하게 된다. 설령 그가 재판에서 죄가 있다고 판결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기소문과 판결문이 합하여 더러운 사회양심을 고발할 것이다. 그 고발장은 다시는 그와 같은 반양심스런 국가권력행사를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사사로이 권력을 행사하거나, 피의자를 먼 나라에 가서 일하게 하는 대사로 임명하거나, 그 임명장을 마치 구원의 소식이나 되는 듯이 덥석 받아서 멀리 도망하게 되는 그런 쪼잔한 행동을 다시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얼마나 궁색하던가? 그래서 채 상병의 죽음과 그 원인을 밝히려는 이 과정은 곧 우리 사회의 양심을 재어보는 시험지란 말이다. 거기에 박 대령이 자기 양심으로 답을 썼다. 또 다른 답을 써야 하는 것들이 자기가 써야 할 답을 채점관의 채점란에 쓰려고 한다. 이러한 우스운 일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집단양심은 파릇한 곳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될 것이다. 양심은 시대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나타나는 것이지만, 간혹 한두 사람의 놀라운 양심의 소유자를 통하여 전체를 관통하고 밝히는 보편양심으로 개인과 사회 전체를 밝혀준다. TV 화면에 당당하게 비치는 박 대령의 얼굴과 생기 잃은 대통령의 얼굴은 바로 이 두 세력이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를 예시해주는 장면이다. 나는 모두가 다 생기 있는 얼굴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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