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대 교목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이다.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말을 조심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말하기에 유익보다 말하기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글들이 많은 것은 말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의 나 됨은 어제 사용했던 말의 결과이고, 내일의 나는 오늘 사용하는 말에 달려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말하기지만 자신의 인격이 드러나는 것은 들어줄 때이다. 돌아보면 내가 했던 말은 언제나 내게 돌아와 영향을 주었다. 그 때문에 말버릇을 고치면 운명이 바뀐다고 말하는 것인가 보다.
‘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지니 속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도덕경에 나오는 다언삭궁(多言數窮)의 뜻이다. 말이 없으면 속을 알 수 없어 음흉하지만, 말이 많으면 허물을 감추기가 어렵다.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입을 열어야 한다는 것은 옛 성현의 교훈이다. 말을 뜻하는 한자 언(言)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는데, 말(言)은 두 번 생각한 다음 입을 열어야 비로소 말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말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 말이 가장 많은 사람은 둘 중 하나이다. 밥값을 계산할 사람이거나 아니면 가장 높은 서열에 있다는 뜻이다. 말하기는 힘을 드러내는 본능이지만 어려운 자리라면 입을 다무는 것이 관계 설정에 유리하다. 말하기로 곤란을 자초하기보다 듣기를 통해 겸손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 이로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시작되고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말의 자유가 주어졌다. 때와 장소라는 예의와 함께 존중과 배려라는 덕목이 필요하지만,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소통이라는 명분으로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그러나 품위와 인격은 찾아보기 어렵고 정제되고 절제된 언어는 실종된 것 같다.
말하기는 하되 듣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터넷 댓글은 이 시대 말하기 수준을 보여준다. 보다 자극적이고 상처를 주는 말들이 합리적 사유를 방해한다. 막말과 욕설은 분노를 일으키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억압한다. 사실을 왜곡하면서도 무책임하고, 비난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도 없다. 통제 없는 말하기의 자유가 권위주의 시대보다 더한 독선과 불통을 낳고 있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듣는 마음으로 선악을 분별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한 것이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듣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왕은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듣기를 택함으로서 지혜를 얻게 되었다. 지혜의 출발이 들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귀한 통찰력이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상담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경청을 꼽았다. 잘 듣는 가운데 서로의 신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상처를 시원한 물에 담가 아픔이 잊힐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 듣기의 소중함을 상기시켜 주는 구절이다.
말하기는 내면에 있는 것을 쏟아내는 행위이지만, 듣기는 내면을 채우는 행위이다. 인간의 몸은 가장 깨끗한 것을 취하지만, 그것이 바깥으로 나올 때는 오물이 된다. 성숙한 사람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으면서 말의 성찬이 시작되었다. 정치권에서 쏟아내는 막말 때문에 국민은 피곤하다. 이제 입 좀 다물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그칠 줄 모른다.
백성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말하는 자유는 보장되었지만, 생존 때문에 입을 다문 탓이다. 내 사정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기에 선거를 치르는 것이다. 국민의 형편을 이해(understand)한다는 것은 언제나 낮은 곳(under)에 서는 것(stand)이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하는 사람이 그립다. 누구나 말하는 시대이지만, 말하기보다 듣기를 요청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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