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덕산면 남연군 묘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소

1960년대 우리나라 영화는 물량면에서도 엄청난 작품을 생산했고 특히 소재 영역에서 매우 다양했다.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죽(竹)의 장막’ 중국을 무대로 하는 작품도 적지 않았는데 ‘비련의 왕비 달기’(주나라), ‘양귀비’(당나라), 그리고 ‘아편전쟁’(청나라) 등 중국 역사의 여러 대목을 조명하는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지금처럼 투자나 기술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그 상상력과 열정은 평가할 만하다. 그 가운데 ‘아편전쟁’(김수용 감독)은 까마득한 시절에 본 영화지만 아직 생생한 실물감으로 떠오른다.

영국이 무차별 살포한 아편으로 청나라 말기 중국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도광제가 흠차대신으로 광동에 파견한 임칙서는 아편을 모조리 몰수, 폐기처분하는 초강수를 두었는데 영국은 이 조치를 빌미삼아 중국진출의 기선을 제압하려 군대를 파견하여 위협하였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의 진척으로 시장 확대가 절실한 상황이어서 각국은 식민지 확보와 특히 동북 아시아 지역으로 진출을 노리고 있던 참이었다. 결국 중국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1842년 남경조약에서 굴욕적 내용으로 영국측 요구를 수용한다. 이후 미국과 프랑스 등과도 유사한 조약을 맺었고 중국은 서구 여러 나라를 비롯하여 이 틈을 노린 약삭빠른 일본, 러시아의 거대한 시장으로 편입되었다.

청나라 진출의 뜻을 이룬 각국은 더 나아가 조선을 넘보며 서해안에 선박을 들이대고 처음에는 소극적인 탐색을 하더니 점차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1866년 유태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지만 실패한 뒤 1868년 미국인을 자본주로, 프랑스인 선교사를 통역 겸 안내인으로 대동하고 지금은 육지가 된 당시의 덕산군 포구 구만포로 상륙한다. 어둠을 틈타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의 분묘<사진>를 도굴하려 하였다. 남연군 묘소는 지금도 분묘 주변에 단단한 암석 돌출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오페르트 일당은 결국 도굴에 실패하였다. 봉분 내부에 석회 처리를 하였는데 이 성분은 물과 결합하면 엄청나게 단단해진다고 한다. 날이 밝자 주민들이 몰려오고 특히 썰물 시간이 되면 선박 이동이 어려워져서 이들 도굴꾼들은 퇴각하였다. 오페르트는 대원군에게 오만불손한 협박성 편지를 보내는 뻔뻔함도 서슴지 않았다.

대원군은 초기에는 문호개방에 크게 부정적이지 않았다는데 병인, 신미양요 등 두차례 소란과 특히 오페르트 도굴미수사건을 계기로 나라의 위신을 훼손하고 왕조를 모욕한 ‘양이’(洋夷)들과 손절할 결심을 굳혔다. 척화(斥和)신념이 강력해지고 쇄국정책은 공고해졌다. 오페르트는 본국 프러시아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 외국과의 통상을 요구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국제관행이 되었지만 과거 서양 여러 나라가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지역 힘이 약한 숱한 나라에 대하여 저지른 행태는 잊지 않아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특히 실권자 존속의 분묘를 도굴, 시신과 부장품 등을 볼모로 통상개방을 요구하려했던 오페르트의 비윤리적인 엽기행태는 세계사에 오점으로 남는 대목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무력을 앞세운 침략과 영토합병이 자행되고 군사력 동원은 없다하더라도 나날이 냉혹하고 처절해지는 외교, 통상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19세기 후반 오페르트 류(類)의 행각은 그 후 더 진화되고 교묘해지면서 지구촌의 자존과 안녕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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