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서정문학연구위원

세월 참 빠르다. 일주일 전에 춘분이 지나갔다. 짧은 게 봄이라지만 봄의 반을 훌쩍 넘어선 시점이다. 춘분(春分)은 24절기의 네 번째로, 낮과 밤이 같아지는 때다. 올해는 3월 20일에 들었으며, 경칩과 청명 사이에 있다. 춘분 이후에는 농가에서 봄보리를 갈고 춘경을 하며 집과 담을 고치고 들나물을 캐 먹었다. 선조들은 춘분을 '나이떡 먹는 날'이라 부르며 가족이 모여서 송편과 비슷한 '나이떡'을 먹었는데, 아이들은 작게 빚고 어른들은 크게 빚어 각각 자신의 나이만큼 먹었다고 한다. 또 춘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면서 각종 농기구와 쟁기를 다루는 마을의 머슴들을 불러 모아 일 년 농사가 잘되길 기원하며 나눠 먹었기 때문에 '머슴떡'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집마다 봄나물을 데치고 무치며 콩을 볶아 먹었는데, 봄나물은 상큼하고 새로운 맛으로 구미를 돋구어 힘을 기르게 하고, 콩을 볶으면 쥐와 새가 사라져 곡식을 축내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춘분 이후 15일을 초후, 차후, 말후로 나누어 현오치(玄鳥至: 검은 새(제비 등의 철새)가 오는 때), 뇌내발성(雷乃發聲: 봄비와 천둥이 치는 시기), 시전(始電: 번개 치는 시기)로 나누어 구별한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춘분이 추분과 같이 공휴일이다.

자연은 참 오묘하다. 어찌 이리 절서(節序)의 순리를 아는가 싶다. 여기저기 꽃은 피어나고 파릇한 새싹이 돋으며 나무의 눈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다. 설렘과 희망이 가득하다. 이때쯤 길 거닐며 읊조리고 싶은 몇 편의 시 -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 전문. 종달새는/빗속에 울고 있었다//각시풀은/우거져 떨고 있었다//송사리떼 열 짓는/징검다리 빨래터//그/길섶//두고 온 일모(日暮)//-박용래의 ‘봄’이고, 나무에 새싹이 돋눈 것을/어떻게 알고/새들은 먼 하늘에서 날아올까//물에 꽃봉오리 진 것을 어떻게 알고/나비는 저승에서 펄펄 날아올까//아가씨 창(窓)인 줄은/또 어떻게 알고/고양이는 울타리에서 저렇게 울까//-김광섭의 ‘봄’이다. 고운 게 무상한 순간포착의 시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이형기의 낙화(洛花)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장편시 ‘황무지’ 첫 행에서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라고 했다. 화창하고 온난하여 봄빛 완연한 4월이 다가온다. 또 옛 노래 유산가를 추려보면 화란춘성하고 만화방창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를 구경을 가세. 죽장망혜 단표자로 천리강산을 들어가니 만산홍록은 일년일도 다시 피어 춘색을 자랑노라…. 기화요초 난만 중에 꽃 속에 잠든 나비 자취 없이 날아간다 유상앵비는 편편금이요 화간접무는 분분설이라 삼춘가절이 좋을씨고 도화만발 점점홍이로구나…. 후략.

호시절이다. 그러나 봄날이 다 좋은 날만 있는 건 아니다. 황사 바람 불어오고 찌푸려 궂은 비 오는 날도 많다. 어떻든 새로운 시작(始作)이다. 2006년부로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지만, 일년지계는 막여종곡이요, 십년지계는 막여수목이라’ 씨앗과 나무를 심는 시절이니 가을 수확의 기쁨과 미래의 좋은 열매를 가려 우량하고 튼실한 종자를 잘 골라 심어야 할 때다. 오는 4월 10일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후 대략 2년 만에 실시하는, 중간선거 격 선거이다. 국민으로서의 바람은 선거가 공명정대하게 치러져, 언행일치의 동량지재(棟梁之材)들이 잘 뽑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리민복, 멸사봉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새싹 돋는 땅에 어제 내내 보슬비 내리더니, 오늘 꽃 활짝 핀 아쉬운 봄날이 스치듯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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