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소재 2천년 전 백제 마지막 종묘사찰

비석에 불상있는 비상 발견 이름 유래 추정 ··· 학계 관심

세종시의 중심축을 이루는 연기현, 전의현, 금남면 중 특히 전의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마주하던 국경지대여서 많은 산성이 밀집해 있다. 백제는 전의현의 진산인 운주산 주변에 고산산성(高山山城)을 비롯하여 전의 향교 뒤의 토성(土城)→ 이성(離城)→ 작성(鵲城)→ 금이성(金伊城) 등 15개 이상의 산성을 세웠는데, 높이가 고작 460m에 불과한 운주산 기슭에는 의미 있는 두 개의 사찰이 있다. 그 하나가 운주산의 옛 지명인 고산에서 유래한 고산사(高山寺)이고, 다른 하나는 금이성 아래의 비암사(碑岩寺)이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남천안나들목을 빠져나와 1번 국도를 타고 조치원 방향으로 달리면 운주산성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운주산 등산로 입구가 전동면 미동리 고산사 주차장이다. 세종시에서는 이곳에서부터 정상까지 약8㎞ 등산로를 정비해서 어린이나 노약자도 등산하기 쉽도록 했다. 정상에는 운주산성 또는 고산산성이라고 하는 백제시대의 산성 터가 있고, 이곳은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풍왕과 복신, 도침 장군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항쟁지로 알려져서 1994년부터 고산사에서 백제 의자왕과 백제부흥군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소개한바 있다(2012. 11.07. 운주산과 운주산성 참조).

운주산 비암사 전경.
한편, 비암사는 대전~천안간 국도 1호선 중 전의면 읍내리를 지나 왼편 공주시로 가는 지방도로 약2㎞쯤의 전동면 금사리 3거리에서 다시 좌회전 하여 다방리 개미고개를 넘으면 보이는데, 조치원읍에서 공주 방면으로 645호 지방도를 따라서 7㎞쯤 떨어진 고복저수지상류의 연기대첩비 공원에서 우회전하여 고개를 넘어서도 갈 수 있다.
그런데, 지방도에서 산길로 약1.3㎞쯤 올라가는 중간쯤 약150m가량은 올라가는 길인데도 마치 내려가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이른바 ‘도깨비 도로’가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세종시에서는 친절하게 도깨비 도로 시작지점과 끝나는 지점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워두기도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비암사는 사적기가 없어서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때 혜명 대사가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 건립한 사찰로서 나말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 경내의 3층 석탑 꼭대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연호와 명문이 새겨진 3개의 비상(碑像)이 발견됨으로서 비암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비상이란 중국 수나라(581∼619)때 크게 유행하던 비석에 불상을 새긴 형식을 말하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비상이 세종시 일대에서만 7개나 발견된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비상 때문에 비암사라는 이름이 지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미륵반가사유상(보물 368호)
계유명삼존불상(국보 106호)
일주문도 없는 비암사 경내에 들어서면 커다란 고목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있고, 한 마당을 중심으로 대웅전과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설선당 등이 그 양편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이것이 애당초 비암사의 규모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중앙에 전면 3칸, 측면 2칸 목조건물로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인 극락보전은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한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양식 기법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에는 높이 1.9m의 아미타불상이 있다(충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
극락보전 왼편에 있는 대웅전 앞에는 법요식과 같은 큰 불사가 있을 때 내거는 괘불대가 있는데, 특히 극락보전 앞에는 높이가 약2.9m가량 되는 3층 석탑이 있다.
석탑은 기단의 4면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날카롭게 하늘로 향해 있는데, 전체적으로 1층 몸돌과 비교할 때 2층 이상의 몸돌이 크게 줄어들고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둔해 보이며, 밑면의 받침이 4단인 점 등으로 보아서 고려시대 탑으로 보인다(충남도지정문화재 제119호). 석탑은 1982년 복원 공사를 할 때 없어진 기단부를 보완하고, 뒤집혀 있던 석재들도 바로 잡았다.

그런데, 1960년 당시 동국대학교 학생이던 연서면 쌍류리 출신 이재옥(李在玉)이 3층 석탑 꼭대기에 있는 반가상과 명문의 탁본을 황수영 교수에게 제출한 뒤, 통일신라 문무왕 때로 추정되는 명문(銘文)이 밝혀지면서 비암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 받침돌, 몸체, 옥개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지만 현재 몸체만 남아 있는데, 몸체 4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앞면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고, 양쪽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는 삼존불로서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의 구세주로 인식되면서 죽음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중생에게 위안을 주는 부처이고, 관세음보살은 인간의 고통에 자비를 베푸는 존재이다.
삼존불 아래에는 사자연화문(獅子蓮花紋)이 조각되고, 아랫단 전면에 4자씩 14행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에서부터 불상을 조성한 연대와 발원자의 이름과 관등이 새겨진 글자를 판독한 결과 ‘계유년(癸酉年) 4월15일 이 지역에 사는 전씨(全氏)가 백제 국왕과 대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한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내말(乃末 : 신라 17관등 중 11위)·대사(大舍 : 17관등 중 12위)·소사(小舍 : 17관등 중 13위) 등 신라 관직명이 나타나서 이 비상을 계유명 전씨아미타불(높이 43㎝)이라고 한다.
석불에 기록된 계유년을 673년으로 추정하는데, 만일 이 추정이 맞는다면 660년 7월 백제가 멸망한 후 13년이 지난 통일신라 문무왕 13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도깨비 도로.
한편, 미륵반가사유석상(높이 41㎝)은 대좌 위에 미륵 부처가 정면에 있고, 좌·우에 보살 입상이 있는데, 뒷면에는 탑 1개가 새겨져 있다. 이 불상에는 명문이 없으나, 그 조각 솜씨나 형태로 보아서 계유명 아미타석불상과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암사에서 발견된 석불 3개는 1962년 10월 국보 제552호, 553호, 554호로 지정되었으나, 그 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공포되면서 계유명 전씨아미타불(癸酉銘 全氏阿彌陀佛碑像)은 국보 제106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축명 아미타불비상(己丑銘 阿彌陀佛碑像)은 보물 제367호로,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은 보물 제368호로 각각 변경되어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비상에 기록된 무인년(戊寅年)은 678년, 기축년(己丑年)을 689년으로 추정할 경우에 비암사는 백제의 부흥운동 과정에서 죽거나 핍박받은 중생의 명복을 빌고 자 지은 사찰로서 선진 중국에서 유행하던 비상을 새길 만큼 개화된 토착세력이 거주하던 지역임과 동시에 명부전의 기능을 크게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지만, 고려시대의 석탑을 생각하면 그 이후 개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1961년 7월 조치원읍 서창리 서광암(瑞光庵)에서도 비암사의 삼존석불과 같은 시기인 계유명 명문이 새겨진 삼존천불상(높이 91㎝)이 발견되어서 국보 제108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불상은 원래 좌대·몸체·2단의 덮개 등 3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좌대가 없이 몸체와 덮개 일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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