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최씨 중용이 심어 보전 8대에 걸쳐 효부·열녀 배출

너른 가지·용틀임 줄기 인상적 ··· 길흉화복 점쳐 온 마을수호신

금년 7월부터 세종특별자치시로 승격한 옛 연기군의 중심은 조치원읍이다. 일제의 영향이 한반도에 물밀 듯이 밀려오던 1901년 8월 서울과 부산간 이른바 경부선 철도부설을 시작하여 1905년 5월 개통되었으며, 1914년 3월 호남선 철도도 개통식을 하게 되었는데, 충청남도청 소재지인 공주와 충청북도청 소재지인 청주 사이인 조치원에 1905년 5월 조치원역을 만들었다. 당시 연기군 북일면 조치원리는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의 개통으로 충북 내륙은 물론 공주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많은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면서 숙박시설과 금융거래, 집하시설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1911년 전의군은 읍 소재지인 연기면에서 북일면 조치원리로 군청을 이전하기에 이르는데 조치원리는 호남선이 개통된 지 5년 뒤인 1919년 4월 조치원~제천까지 연결하는 충북선도 개통됨으로서 명실 공히 종래 충북지방의 생산물을 운송하던 금강의 내항이던 충북 청원군의 부강의 역할을 대신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1931년 4월 조치원읍으로 승격하게 된다. 더불어 전의군은 전의면과 전동면으로 분리되면서 사라지고, 역세권인 조치원읍을 중심으로 지금의 연기군이 신설되었다.
조치원읍은 1970년대 들어서 정부의 수도권 분산정책의 하나로 대학의 지방이전 조치에 따라서 고려대학교, 홍익대학교가 분교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연기군 일대는 참여정부 때 추진하던 행정수도이전 후보지로 오랜 논란 끝에 금년 7월 세종시로 출범하면서 종래의 연기군 전부와 인접한 공주시, 충북 청원군 일부를 흡수하면서 특별자치시라는 광역지자체로 승격된 것이다.

지지대 받쳐 둔 향나무(왼쪽)과 연못과 3층 석탑.
세종시를 구성하고 있는 전의현, 연기현, 금남면 등 3개 권역 중 전의 지역의 진산이 운주산(460m)이라고 한다면, 조치원의 진산은 읍 서남쪽에 위치한 오봉산(五峰山; 262m)이다(2012. 11.07. 운주산 운주산성 참조).
오봉산은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서 풍수지리상 제1봉은 목형봉(木形峰- 정상봉), 제2봉은 화형봉(火形峰- 牛角峰 또는 평상봉), 제3봉은 토형봉(土形峰- 聖主峰), 제4봉은 금형봉(金形峰- 主峰 또는 두루봉), 제5봉은 수형봉(水形峰- 平當峰)으로 5행을 갖추었다고 하며, 오봉산 동쪽 기슭의 봉산리란 마을이름도 오봉산에서 유래되었다.
오봉산은 높이가 262m에 불과하지만 평야에 위치하고 있어서 비교적 높게 보이는데, 산 중턱의 약수터는 기우제와 산제를 지내는 영험한 산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며,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이 칭송하면서 연기 팔경(燕岐八景)중의 하나로 오봉산의 낙조(落照)를 말하기도 했다.
조선 성종 때 출간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오봉산에는 안선사와 흥천사란 절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절터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석불과 유물 일부만 불일선원과 연기향토사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대전~천안간 국도 1호선 중 고려대 세종캠퍼스 앞 조치원여고 입구 편도 1차선 포장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봉산 등산로 입구가 있는데, 주차장에서 등산로 쪽에 강화최씨 시조의 사당인 숭모단(崇慕壇)이 있다.
세종시에서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사계절 솔잎 향이 그윽한 소나무 숲과 함께 경사가 가파른 오봉산에 약3.2km가량 맨발로 걸을 수 있는 등산로를 개설했으며, 정상에 팔각정과 전망테크도 세웠다. 이곳에 오르면 조치원읍 시내는 물론 시립공원인 고복공원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또, 주민의 편익을 위해서 고려대학교 세종시 캠퍼스 뒷산의 등산로와 오봉산 등산로를 연결하는 25m의 보도육교도 설치했다.

사실 오봉산 기슭의 마을인 봉산리는 20세기 초 경부선 기차역을 세우면서 태어난 조치원읍의 거의 모든 문화재가 모여 있다고 할 만큼 유서 깊은 마을인데, 마을 한가운데에는 수령이 약480년쯤으로 추정되는 향나무 한그루가 있다(천연기념물 제321호).
본래는 마을 뒷산 골짜기에서부터 너른 벌판 모두 최씨 문중의 땅이었다고 하지만, 최씨 집성촌이던 봉산리에 남아있는 강화 최씨는 현재 마을주민 40여가구 중 절반도 되지 않는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조선 중종(1506~ 1544) 때 강화 최씨인 최완이 낙향하여 이곳에서 살다가 죽자 그의 아들 최중용(崔重龍)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향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최중용이 집안에 효열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면서 심은 향나무의 음덕인지 후손 중에는 8대에 걸쳐서 15명의 효자와 열부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봉산리 향나무 줄기.
약3.2m 높이의 향나무는 지상 50cm쯤에서 갈라진 커다란 가지와 원대가 서로 꼬고 꼬이면서 동쪽을 향하여 비스듬히 자라다가 동서 11.2m, 남북 11m가량 우산처럼 펼쳐진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나무 그늘은 약100여 명 정도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세종시에서는 향나무를 보호하고 또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땅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높이 1m정도의 축대를 장방형으로 쌓고 철책을 나지막하게 설치했으며, 20여 개의 받침목을 세워 주었다. 또, 그동안 1996년 외과수술에 이어 1999년에도 외과수술, 수형조절 뿌리수술 및 토양개량과 영양공급을 받은데 이어서 올해 3회째 보호시술을 했고, 향나무 관리를 위해서 출입문도 만들었다.

본래 편백나무 과에 속하는 향나무는 한국 혹은 중국이 원산지라고 하는데, 상나무 혹은 노송나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정원수로서 중부 이남지방에 널리 재배되고 있는 향나무는 향기가 그윽한 상록수로서 엄동설한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 효열(孝烈)을 가르친다고 해서 예부터 향교, 서원 등지에서 많이 심었다. 잎은 바늘모양의 침엽수로서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고대부터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많이 쓰였다.

향나무는 뚝향나무, 눈향나무, 섬향나무 등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뚝향나무는 줄기가 똑바로 서지 못하고 가지가 수평으로 펴지며, 경기도와 경상도 북부지방에서 흔히 자란다. 또, 눈향나무는 주로 높은 고산지대애서 자라고, 섬향나무는 해안가에서 많이 자생한다.
뚝향나무의 일종인 봉산리 향나무에 대해서 마을주민들은 향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고 마을이 평화롭지만, 나무가 시원치 않으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고 있다.
아무튼 세종시가 문화재 보호와 장려에 노력하는 취지는 십분 이해하더라도 향나무 왼편에는 작은 연못과 조상의 덕을 비는 작은 3층 석탑이 있는데, 이것이 강화최씨가 거주하면서 만든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 향나무 오른쪽에 최완의 후손이 살던 집이 폐가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도 방문객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또, 향나무가 오봉산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라 오봉산 기슭의 봉산리 마을 속에 있는 것을 굳이 ‘오봉산 향나무’라고 명명한 것도 지나친 처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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