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자 조창래 시어머니 꿈에 절터 계시 고종 30년 2개 불상 출토 후 창건

비로전에 본존불과 함께 두 비상 공개 백제 불교예술 사조 판단 사료 가치 커

2012년 7월 연기군은 세종특별자치시라는 광역지자체로 승격하였지만, 연말까지 세종시로 이전하는 중앙부처는 15곳 중 재정부, 국토해양부, 환경부, 농림수산식품부 등 4개 부처와 공정거래위원회 뿐이다. 금년 말 국무총리실이 이전하고 순차적으로 이전하면서 2030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라고 하고, 당분간 옛 연기군청이 세종시청 이름을 바꿔달고 있는 등 엉거주춤한 상태가 계속될 것 같다.

연화사 입구 편액.
본래 크고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우리 민족성답게 세종시는 삼국시대 이래 유지되어오던 연기(燕岐)라는 지명을 지우는 노력이 한창인데,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세워진 100년 조치원역도 세종역으로 개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2012.11.14. 고복저수지 참조). 하긴 조치원역이 신설된 이후 사람과 물자가 집결하면서 연기군 북일면 조치원리가 조치원읍으로 승격되면서 북일면의 나머지 지역은 인근으로 분산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듯이 세종시의 출범으로 옛 연기군의 지명은 물론 그 읍·면들까지 통폐합되거나 사라지고, 다른 한편 충북 청원군 일부와 공주시 일부가 편입되는 등 당분간 행정관할과 지명의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대전~천안간 국도 1호선 중 세종시 조치원읍을 관통하는 신설도로에서 고려대 세종캠퍼스에 이르기 직전 조치원읍과 연서면 경계의 낮은 구릉에 연화사(蓮花寺)가 있다.
본래의 연화사는 인근의 생천사지(生千寺址)였지만, 현재의 복숭아 과수원 속의 연화사를 건립하게 된 것은 1893년(고종 30) 창건자인 조창례씨의 시어머니 꿈속에서 부처님이 계시한 곳에 건립했다고 한다. 당시 참선 수행하던 승려들은 조정의 공역에 동원되어 수행할 곳이 없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녔는데, 운주산에 이르러 100일 기도를 하던 중 부처님이 현재의 권터 골을 계시한 땅을 파보니, 두 개의 아미타 석불이 출토되어서 이곳에 부지를 구입하여 사찰을 건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석불이 통일신라시대의 석불로 추정되는 무인명 불비상 및 대좌(戊寅銘佛碑像.臺座; 보물 제649호)와 칠존석비상(七尊佛碑像; 보물 제650호)인데, 아미타불은 영원한 수명과 무한한 광명을 보장해주는 부처님으로서 어떤 중생이라도 착한 일을 하고 아미타불을 지극 정성으로 부르면 서방극락으로 맞아들이는 부처님을 뜻한다.

연화사 비로전에 본존불과 함께 불전에 모셔놓은 연화사 칠존불비상과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세종시는 복숭아와 배 주산지이긴 하지만, 월하리 과수원 마을 안에 자리 잡은 연화사는 가람배치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아서 마당에 세워진 석탑만 없다면 여염집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심지어 중생이 살아가는 과수원, 민가 등 속세와 부처님의 불법세계를 구분하는 일주문이며, 가람을 구분하는 담장도 없다.
작은 사립문 같은 대문이 담장도 없이 덩그마니 서있는 뒤편으로 본전인 비로전이 있고, 그 오른편에 삼성각, 왼편에 요사채가 있다. 비로전에는 중앙에 부처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무인명 불비상과 대좌, 왼편에 칠존석비상을 유리보호각 안에 모시고 있다.
그 외에도 본존 부처와 유리보호각의 각 석비상 사이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있고, 그 뒤에 아미타후불태화, 관음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있다.

비상(碑像)이란 중국 수나라(581∼619)때 크게 유행하던 비석에 불상을 새긴 형식을 말하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비상이 운주산 비암사에서 3개, 조치원읍 서광암에서 2개, 연화사에서 2개 등 세종시 일대에서만 7개가 발견된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비암사에서 발견된 비상은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서광암에서 발견된 비상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지만, 연화사에서 발굴된 비상만은 연화사에서 직접 소장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2012.11.21. 운주산 비암사 참조).
연화사에서는 1997년 비로전에 모신 부처의 양쪽에 유리보호각을 만들어서 비상을 보존하면서, 도난 방지를 위하여 CCTV까지 설치했다. 그러나 친견은 가능하지만, 사진촬영은 일체 허락하지 않고 있는 조치는 지니친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연화사 칠존불비상 정면.
비로전의 본전인 부처 오른편에 있는 무인명 불비상(보물 제649호)은 위가 좁고 아래는 넓은 사다리꼴 형태의 납석(蠟石)에 연꽃무늬가 새겼는데, 앞면에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양쪽으로 나한상·보살상이 2구씩 놓여진 5존불(五尊佛) 등을 조각하고, 석상 아래 위에는 다른 돌을 끼워 넣기 위한 돌기를 만들고 다른 돌로 대좌(臺座)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좌는 불상과 같이 조성된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가져다 놓은 것이어서 크기도 맞지 않아서 아쉬움이 크다. 본존불의 얼굴은 심하게 마멸되었지만 손의 모양과 옷 주름의 형태 등으로 보아 아미타불(阿彌陀佛) 부처로 추정된다. 그 아래쪽은 卍자 무늬를 난간처럼 만들고, 그 위에 공간을 낮게 다듬어서 불상을 조각한 연도 등을 적은 글을 4줄 새겨 놓은 글자 중에서 나타난 무인년(戊寅年)을 백제가 멸망한 이후인 신라 문무왕 18년(678)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한편, 부처 왼편에서 유리보호각에 보호되고 있는 칠존석비상(보물 제650호)은 얼핏 보면 그 외형은 마치 연꽃무늬가 새겨진 작은 배 위에 칠존불을 새겨놓은 형국인데, 마름모꼴의 돌 표면에 본존여래상을 중심으로 7존불(七尊佛)을 조각했다.
상단의 옷주름이 새겨진 네모난 대좌 앞면에는 두툼한 연꽃 봉오리를 중심으로 좌우에서 연줄기가 피어오르고, 끝에는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연줄기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 좌우에 협시보살이 서 있으며, 본존과 협시보살 사이에는 상체만 내밀고 있는 나한상이, 밖으로는 인왕상이 사자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칠존석비상의 본존불도 무인명 불비상과 마찬가지로 얼굴은 마멸되었으나, 당당한 신체에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게 양 어깨를 감싼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은 각각 원형의 머리광배를 가지고 있는데, 광배에 연꽃무늬와 불꽃무늬,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본전 비로전 전경.
사실 6세기 말인 중국 6조시대에 유행하던 비상이 연화사를 비롯한 세종시 일대에서 많이 발견되어 그 사찰들은 7세기 초 백제시대에 창건하였을 가능성도 크지만, 현재까지는 '무인(戊寅)'이란 간지를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때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비암사에서 발견된 계유명 전씨아미타불비상과 동일한 조각기법, 그리고 무인(戊寅)이라고 새겨진 명문이 동일시기여서 연화사 석불비상도 678년, 즉 백제 멸망 직후로 추정하는 것이다(2012.11.21. 운주산 비암사 참조).
그런데, 아미타불과 미륵존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소중한 것으로 주목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광배의 연꽃무늬나 협시보살의 가늘고 긴 모습으로서 세종시 지역의 높은 불교예술 수준과 백제양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연화사는 1999년 5층 석탑과 비로전 양쪽에 석등을 만들고, 2010년에는 비로전을 개축하고, 2012년에는 문화재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대웅전 단청사업을 하는 등 중창이 한창이지만, 사찰의 불법세계와 중생이 살고 있는 세속세계를 가르는 일주문과 담당은 물론, 사찰의 고색창연함은 아직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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