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도읍 공주·부여 국경지대로 금강·미호천 방어하기 위해

동성왕 때 무려 30여개 성 쌓아 계족산성 등 삼국시대 것만 40여개

대전의 산
웅진시대의 백제는 신라의 주요 침투로인 금강과 미호천을 방어하기 위하여 두 강의 주변에 방어 목적의 산성을 많이 세웠다. 특히 23대 동성왕(479~ 501)은 신라 소지왕 때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하고 나제동맹을 맺었으나, 신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많은 성을 쌓아서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2012.11.07. 운주산 운주산성 참조).
즉 동성왕 8년 우두성(牛頭城; 서천군 한산~기산 일대)을 쌓고, 12년 7월에는 사현성(沙峴城; 세종시)·이산성(耳山城)을, 왕 20년 7월에는 사정성(沙井城 : 대전 사정동)을, 23년 7월 탄현(炭峴 : 대전과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이의 식장산 고개)에 목책을 세워서 신라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계족산성(鷄足山城)을 비롯하여 적오산성(赤鰲山城 : 대덕연구단지의 에너지연구소 서남쪽)·소문산성(蘇文山城 : 유성구 신동과 세종시 금남면 대박리 뒷산), 탄현·질현성(迭峴城 : 사기재라고도 하며, 동구 가양동에서 비룡동을 넘는 고개 위의 산성, 대전시기념물 제8호)·능성(陵城; 대전시기념물 제11호)·갈현성(葛峴城) 등과 옥천 부근에 있는 환산성·서산성(西山城), 비파산성(소호동과 대별동을 넘어가는 고개를 ‘비파치’라 불렀는데, 고개이름을 딴 비파산성은 소호동산성이라고도 함) 등 30여 개에 이르는 많은 성을 쌓았다.

계족산에서 본 대청댐.
1905년 5월 25일 경부선 철도 대전역이, 그리고 9년 뒤인 1914년 3월 22일 호남선 철도 서대전역이 각각 세워지면서 대전역과 서대전역을 잇는 도로변을 중심으로 상가가 형성되면서 신도시로 급성장하게 된 한밭 대전은 조선시대의 회덕현, 진잠현, 유성현을 포함한 지역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국경을 마주했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 지역으로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산성 40여개를 보유하고 있는 산성(山城)의 도시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 16년(757) 우술군을 비풍군(比豊郡)으로 고쳐졌는데, 청주 목의 관할이던 비풍군의 치소는 지금의 회덕 일대이다.
고려 현종 9년(1018) 전국을 5도로 개편할 때 비풍군은 회덕(懷德)으로 개칭되면서 공주 목 관할로 바뀌지만 같은 지명을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한말까지도 유성현의 변두리로서 금산에서 금강으로 흐르는 지류인 대전천에 민가 몇 채만 있던 마을 한밭이 경부선 철도 대전역이 신설된 이후 1938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을 옮겨오면서 더욱 번성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당시 교통의 중추인 철도의 편리성에 기대어 대전에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대전은 다양한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되었다.

계족산 숲속 음악회장.
현재 150만 시민이 살고 있는 국내 제6위의 대도시 대전광역시는 역사적 일천성과 전국 각지에서 이주해온 시민들로 인해서 시민통합이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는데, 대전의 역사적 일천성을 단번에 불식시키고 시민통합을 이룰 소재는 공통된 관심사의 개발로서 시민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에 설치했던 산성의 기능과 역할이 크게 감소된 것이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백제의 도읍이던 공주와 부여의 주변 국경지대로서 대전의 동쪽 산악능선에 즐비하게 세웠던 수많은 산성들, 그리고 진잠현, 유성현, 회덕현을 아우르는 역사와 유적의 발굴과 복원 내지 개발에 대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전시의 노력은 그다지 괄목할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고 2010년부터 시작된 산성 트레킹과 산성축제, 대전 둘레산길 잇기 사업을 벌이고 있으나, 대전 지역의 산성 자원을 널리 홍보하고, 관광자원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나 추진방향, 홍보 노력은 크게 미흡해 보인다.

대전시 동구와 대덕구에 걸쳐서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계족산은 원래 삼국시대에는 산세가 마치 항아리 같다고 해서 ‘옹산(甕山)’이라고 불렀으나, 신라통일 이후에는 산의 줄기가 닭의 발과 비슷하게 갈라졌다고 하여 계족산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고려사와 조선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같은 지명이 사용되었다.
회덕현의 진산이던 계족산은 닭의 발 중 정강이 부분은 동구에 걸쳐 있고, 발 부분은 대덕구에 걸쳐있는 셈이지만, 계족산은 봉황산(鳳凰山)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봉황산 아래에 정착한 송씨 가문에서 벼슬에 오른 인재가 많이 나와 명성을 떨치자 송씨 가문을 시기한 사람들이 봉황산을 격하시켜 계족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고, 또 일제 강점기 때 봉황산을 닭발산(계족산)으로 고쳤다는 설, 그리고 지금의 회덕 일원인 송촌에 지네가 들끓어 닭을 상징화함으로써 지네를 없애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속설도 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해서 '비수리' 또는 '백달산'이라고도 불린다.

계족산성.
아무튼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이던 계족산 주변은 시민들의 레저를 위하여 산책로, 휴양림, 등산코스 등이 많이 개발되어 있으나, 그 관리와 보존 상태는 한심하다고 할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는 계족산 등산 코스는 무분별하다고 할 정도이다.
현재 비래동→비래사→절 고개→계족산성→임도 삼거리→봉황정 코스와 계족산성 코스를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고, 읍내동→용화사→봉황정 코스와 가양동에서 대전터널 위 길치고개로 오른 뒤 절 고개를 지나 봉황정→죽림정사→절 고개→계족산성, 그리고 장동삼림욕장에서 올라가는 코스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비래동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비래동 버스 종점에서 왼쪽으로 고속도로를 끼고 이어지는 좁은 길로 약100m쯤 가다가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면 진입로 아래의 굴다리를 지나서 대전나들목 상행선 진입로를 왼쪽으로 끼고 ⊃자형으로 이어지면서 시작한다. 이 길을 따라서 약7~8분쯤 가면 송촌동 선비마을 아파트단지에서 고속도로 아래를 빠져나오는 굴다리 입구 삼거리에 닿고, 삼거리에서 오른쪽 비래골로 들어서서 길가에 수령 550년이라고 하는 느티나무를 지나 마을길로 15분가량 들어가면 옥류각(대전시유형문화재 제7호)인데, 옥류각 뒷마당이 바로 비래사 대웅전 앞마당이다. 비래사에는 목조비로자나불상(유형문화재 제30호)이 있다.
비래사에서 계곡 길로 들어서 약7~8분 올라가 약수터를 지나 왼쪽으로 돌아서 이어지는 산길로 10분쯤 올라가면 대덕구와 동구 경계인 절 고개에 이르는데, 절 고개에는 정자와 이동매점이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5분 정도 오르면 368m봉 삼거리이고, 서쪽 능선 길은 정상인 봉황정으로 가는 길이다. 또, 북쪽으로 난 능선 길로 7~8분가면 성재산(398.7m)인데, 산불감시 무인탑이 있는 이곳에서 동쪽으로 조망되는 대청호 풍경은 대청호 사진을 찍은 포인트이기도 하다. 성재산을 뒤로 하고 25분쯤 거리에 계족산성이 있다.

장동산림욕장.
그런데, 장동 삼림욕장에서 올라가는 길은 모 소주회사에서 황톳길을 만들어서 시민에게 제공하여 맨발로 등산하기도 하고, 여름철에는 산속 음악회를 열기도 하는 등 삼림욕장과 함께 레저장소로 크게 이용되는 구간이기도 하지만, 삼림욕장까지의 구간 이외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황톳길도 등산로 한쪽에 황토를 깔아놓은 정도여서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은 물론 비나 눈이 내리면 질퍽거리기 일쑤이고, 바닥도 롤러 같은 것으로 다듬지 않아서 요철이 매우 심하다. 무엇보다도 등산로와 임도를 확장한 황톳길을 구분해서 안내하는 지도도 터무니없이 형식적이고, 또 둘레산길 이정표와 엇갈려 세워져서 혼란스러워 차라리 없애느니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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