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至(동지)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春風(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다. 이 시조가 한시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그 예를 들어 보자.

冬之永夜(동지영야) : 겨울의 기나긴 밤 - 신위(申緯)
截取冬之 夜半强(절취동지 야반강) : 동짓밤 기나긴 밤, 절반을 끊어내어
春風被裏 屈蟠藏(춘풍피이 굴반장) : 봄바람 따뜻한 이불 속에 서려두었다가
燈明酒煖 郞來夕(등명주난 랑래석) : 임 오신 날 밤, 등불 밝혀 술 데워서
曲曲鋪成 折折長(곡곡포성 절절장) : 굽이굽이 펴내어서 절절이 늘리리라.

반(蟠)은 뱀이 똬리를 틀고 서리어 있는 모습이다.

자하(紫霞) 신위는 위 시조를 포함한 40수를 한시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소악부’라는 책을 내면서 이제현이 처음 시도한 ‘소악부(小樂府)’의 공적을 칭찬했다.

이야기는 고려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소악부에는 고려속요를 한시로 번안(飜案)한 11수가 기록돼 있는데 우리말로도 전해지는 속요는 처용가(處容歌)·서경별곡(西京別曲)·정과정(鄭瓜亭)이고 나머지는 ‘고려사’ 악지 등에 가명(歌名)이나 노래 내용만이 전해 온다.

원래 악부(樂府)는 한(漢)대의 음악을 관장하는 기관 이름이면서 동시에 불리는 노래의 가사인 시가를 말했는데, 이제현이 그 앞에 소(小)자를 덧붙여 또 하나의 문학장르가 생겨난 것이다.

신위가 치하한 것은 바로 소악부에 고려속요를 기록해 비록 한자로나마 후세에 전해준 공로를 말하는 것이겠다.(더 많은 속요를 남겼다면 지금은 아마 국보급이 됐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한글 시조집이 나돌고 있는 신위(1769~1845) 당시에 왜 굳이 한시 번역을 시도했을까? 필자는 이것을 세계화(Globalization)의 일환이었다고 추정한다.

우리 선비들과 중국 관리 및 학자의 교류가 있었을 터, 그들이 우리 고유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면 뭐라고 했을까? 노래를 부르더라도 그 뜻을 모를 테니 당시의 글로벌(?)한 양식인 한시 번역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신위 이후에도 이유원(李裕元)의 ‘가오소악부(嘉梧小樂府)’ 역시 시조를 소재 삼아 한시로 번역했고 ‘해동악부(海東樂府)’ 100수도 이제현의 소악부법을 따랐다.

최근에는 ‘지귤이향집(枳橘異香集)’에 시조를 한시로 번역한 312수의 7언 절구가 있다. 현대 불교학자인 권상로(權相老, 1879~1965)가 지었으며, 지귤이향이란 제목은 강남의 귤(橘)이 강북으로 넘어가면 탱자(枳)가 된다는 속담을 인용, 시조와 한시가 근본적으로 다른 형식과 운율을 지니고 있어 번역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러면 지귤이향집에서 황진이의 시조를 다른 버전으로 보자.

冬之永夜 折其腰(동지영야 절기요) 겨울의 기나긴 밤 그 허리를 잘라내어
衾裏深藏 不浪消(금리심장 불량소) 이불 속에 깊이 감추어 소모하지 않았다가
留待春風 郞到夕(유대춘풍 낭도석) 봄바람 불 때까지 남기고 기다려 임 오신 저녁에
鋪陳曲曲 做良宵(포진곡곡 주량소) 하늘 끝까지 굽이굽이 맘껏 펼치리라

포(鋪)는 도로 포장(鋪裝)이란 말에서 보듯 진(陳)과 함께 ‘펴다’의 뜻이다.

소악부의 효용은 시조의 멋과 맛, 그 생기와 발랄함을 즐길 줄 아는 나라 안에서보다 나라 밖에서 더 컸을 것 같다.

물론 저자가 공들여 한시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애창가요(시조)가 무엇이었는지 엿볼 수 있고 평민이 지은 시조를 인용, 백성의 삶에 관심을 표출한 것이라든지 민간 정서의 구현이라는 등의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것을 주체적으로 알리고 보존하려고 했던 사대부 선조의 마음에 있다고 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은 고금에 통하는 것 같다.

-김덕영 대전시 경제정책협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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