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성은 '백제계 산성' 주류 신라 침입 막기 위해 축조

식장산 숯고개·성재라 불리기도 효심 깊은 부부의 전설 서린 곳

식장산에서 바라본 대전시내.
계족산 주변의 산성은 사실 동구 쪽에 보다 조밀하게 세워져서 이현동산성·장동산성·성티산성·노고성·견두성·마산동산성·질현성·고봉산성(古鳳山城 : 추동 중추마을 뒷산)·능성·갈현성 등 30여 개에 이르는 산성을 중심으로 백제가 방어선을 구축한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가양동·자양동에서 비룡동 비름들 마을로 넘어가는 ‘비름들 고개’위에 위치하고 있는 능성은 용운동 대전대학교 북쪽의 성재산(313m) 정상부에서 중턱에 걸쳐 소쿠리 모양으로 쌓은 석성으로서 용운동도서관 뒷길에 있는 용천약수터에서 30분가량 오르는 갈현성을 지나 능선을 따라 약20분쯤 가면 있다. 가양동에서 우암사적공원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서 옥정사 약수터에서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도 된다.

정상에서는 멀리 동쪽으로 주산동, 신상동, 세천동 등 대청댐이 한 눈에 들어오며, 남쪽의 식장산에서 보문산성, 갑천, 그리고 북쪽의 계족산성에 이르기까지 한밭 벌 전체를 바라볼 수 있기도 하다. 또, 대청댐 건너에 있는 백골산성(白骨山城)과도 연결되며,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백제 역사상에 탄현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또, 능성은 동서남북의 네 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벽의 일부와 서벽과 남벽의 일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축성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치성(雉城)의 흔적이다.

치성은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성벽에서 다시 바깥쪽으로 내어 쌓은 성으로서 성벽에 접근한 적군을 측면에서 공격하도록 고안된 구조물로서 백제시대 때 축조된 산성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것이다. 능성이 있는 성재산의 정상은 체육공원으로 개발되어서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으며, 또한 용운동 용천약수터 방면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로도 이용되고 있다.

한편, 용운동에서 세천·비룡동으로 넘어가는 속칭 칡고개 혹은 갈고개라고 하는 북쪽 산봉우리(263m)를 마치 테를 두른 듯이 쌓은 석축산성인 갈현성이 있다.

갈현성은 대전대학교 방향이나 경부고속도로 판암나들목에서 용운동 길로 향하다가 시내버스 종점 직전에 우회전해서 표지판의 임도를 따라서 약30분쯤 올라가면 된다.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고, 동쪽 성벽에 네모난 돌로 앞면을 맞춰 쌓은 높이 2m가량만 남아 있는 것을 1990년 5월 28일 대전시기념물 제12호로 지정했다. 정상에서는 왼쪽으로 대청호가 푸른빛을 발산하고, 오른쪽으로는 대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런데, 대전시에서는 주변에 풍부한 산성을 관광이나 개발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고작 둘레산길로 활용하는 것 같고, 삼국시대 이 지역의 살벌함과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속 음악회와 둘레산길 코스로 이용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계족산성
무엇보다도 계족산성 남쪽 23리쯤에 떨어진 식장산성(食藏山城)과 함께 백제의 대표적인 유적으로서 백제가 망한 뒤에도 신라에서 백제로 통하는 교통로이던 이곳을 거점으로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정상 부분에 능선을 따라서 병풍처럼 둘러싼 약1.3㎞가량의 테뫼식 산성이 있다. 테뫼식이란 말 그대로 산 정상 7-8부쯤에서 마치 산에 테를 두르듯 둘러쌓는 방식인데, 그 복원 상태는 실망스럽기만 하다.

사실 계족산성은 백제가 쌓은 산성인지, 신라의 산성인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론이 분분해서 일본인 학자들과 일부 국내학자들은 신라에서 만든 근처의 삼년산성(충북 보은)과 같은 축성법의 산성으로서 신라의 산성이라고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백제계 산성이라는 것이 주류이다(사적 제355호).

그것은 봉황정의 봉우리와 달리 계족산성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이 신라 쪽을 향하여 사방으로 막힘없는 조망이 펼쳐져서 북동쪽으로는 대청호 뒤로 보은군의 높고 낮은 산들이 멀리 속리산과 함께 보이고, 옥천 고리산이 보이는 점 등에서 신라를 방어하기 위한 백제 산성인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대청호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모습과 함께 남으로 식장산, 남서쪽으로 산디마을 계곡 건너 계족산 정상이 마주보이며, 서쪽으로는 회덕분기점과 갑천과 평행선을 이루는 고속전철 철길이 내려다보인다.

아무튼 고려시대에도 몽고의 침략 중에 이곳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항몽운동의 기지로 삼았으며, 조선말에도 동학혁명군의 근거지로도 삼았던 산성 안에서는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과 조선시대 자기 파편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 산꼭대기에 조선시대 한양과 경상도를 연락하던 봉수 터가 있는데, 이곳은 동쪽으로 충북 옥천군의 환산봉수(環山烽燧)와 연결되고, 북쪽으로 충북 문의현의 소이산봉수(所以山)와 연결되어 조선시대에는 산성보다는 봉수기능으로 더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동·서·남쪽의 3개소에 성문이 있고, 우물터도 2개소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복원(?)한 산성의 모습을 보면 마치 산성 쌓는 실습장 같기만 해서 아쉬움이 크다.

산성 복원이라고 쌓아 놓은 것을 살펴보면 충북 쪽은 무방비 상태이고, 대전 쪽에만 마치 갯가의 제방처럼 차곡차곡 쌓은 것이며, 석축 기법조차 역사학자들의 고증은 제대로 받았는지조차 의심스러워서 차라리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음만 못한 것 같다.

봉황정에서 바라본 계족산성.
한편, 대전시 동구 판암동·세천동·산내동을 연결되면서 충북 군서면·군북면과 경계를 이루는 식장산은 ‘숯고개(炭峴) 혹은 성재’라고도 하는데, 삼국시대에 백제는 신라의 국경지대인 이곳에 성을 쌓고 군량을 많이 비축해 둔 요새로서 군량미를 쌓아두는 곳이라는 의미의 "식장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식장산의 지명에 관한 또 다른 전설은 효성이 지극한 부부가 연로한 노모의 밥을 뺏어 먹는 어린 자식들을 버리려고 산으로 데리고 가서 아들을 파묻으려고 땅을 파다 보니, 끝없이 먹을 것이 나오는 밥그릇이 나와서 아들 파묻기를 포기하고 내려와서 풍족하게 살았는데, 노모가 돌아가시자 아들은 그 밥그릇을 다시 이 산에 묻어서 식장산 혹은 식기산이라고도 불린다.

식장산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이 넘어온 탄현이 곧 이곳이라는 학설이 주류이지만, 반론을 펴는 학설도 많다.

식장산에는 신라시대 때 도선 국가가 창건하고, 조선조 인조 때 수등국사에 의해 중건됐다고 전하는 유서 깊은 고산사와 귀절사, 개심사 등 유명 사찰이 있지만, 근래에는 대청댐 건설 이전에는 대전 지역의 중요한 상수원이던 세천저수지 주변을 중심으로 한 세천공원이 개발되어 관광지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세천공원 주차장에서 저수지 오른쪽 길을 따라 새절골 계곡을 타고 올라가면 잘 정비된 등산로와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귀절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한다. 산 정상 막바지에 매어 놓은 밧줄을 잡고 올라서면 환선(고리산)과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고, 여기에서 약6분쯤 산허리를 돌아가면 절벽 아래에 귀절사가 있다.

또, 대성동의 고산사 입구에서 식장산의 서쪽 산으로 등산하는 코스도 개발되어 있는데, 이 코스는 개심사에서 고산사로 넘어 오거나 곧바로 산등성이와 산허리를 타고 기도터까지 갈 수도 있다. 서쪽 산등성이의 산불 감시초소 밑의 기도터 갈림길에서 오른쪽 비탈길은 산허리를 세 굽이 돌면 기도터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식장산 정상 주위를 북동쪽으로 돌아서 기도터로 가는 길이다. 고개에서 산허리를 돌아나갈 때는 경사가 심해서 조심해야 한다.

식장산은 산세가 다소 높아 멀리서 보면 경사가 매우 급하여 정상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아름답다. 대전시에서는 시민들의 애향심과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대전 둘레산길 잇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곳 갈현성은 세천고개-갈현성-질현성-계족산(11km)에 이르는 둘레산 잇기 5구간 코스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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