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관·서원 등 16동 건물 복원 우암 송시열 선생 학문·정신 기려

주자학에 몰두 ··· 학문수양 열심 유물관엔 담비 털옷 등 유물 전시

남간정사.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인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중 기호학파의 큰 줄기를 면면히 이어온 서인의 거두이자 노론의 지주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 1607~1689)은 대전이 낳은 위대한 인물이다.
16대 인조부터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등 4임금을 섬긴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한 사람의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것은 오직 그 뿐이고, 전국 42개 서원에서 그를 배향하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 그의 존재를 평가할 수 있는데, 대전시에서는 전통문화와 보존을 위한 노력의 하나로 1991년부터 1997년까지 가양동 대전보건대학 옆 계족산 기슭을 성역화 하여 우암사적공원을 만들었다.
우암사적공원은 숙종 9년(1683) 우암이 흥농서재(興農書齋)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남간정사(南澗精舍 :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일대 1만 6000여 평의 대지에 장판각, 전시관, 서원 등 16동의 건물을 복원한 곳으로서 1998년 4월 사적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홍살문
사적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가운데에 붉은 나무기둥으로 세운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을 지나서부터는 경사진 자연계곡을 따라서 건물들이 양쪽에 배치되어 있다. 공원 입구 왼편 돌담장 안에는 남간정사와 건축미가 뛰어난 기국정(杞菊亭)이 있는데, 남간정사는 강당 겸 서재인 목조기와건물로서 우암의 제자이자 기호학파를 계승한 권상하·송상민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배향하고 있다. 기국정은 효종 5년(1654) 우암이 낙향했을 때 소제동에 방죽을 쌓고 연못가에 세웠던 별당인데, 연못이 매립될 때 옮겨지은 것이다.
남간정사와 기국정 바로 위에는 우암의 종손이 기거하는 주택이 있고, 그 위쪽에 봄, 가을 우암의 제향 봉행이 이루어지는 남간사와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에는 효종이 우암에게 북벌을 당부하며 하사했다는 담비 털옷을 비롯해서 우암의 영정 등 유품과 장서 그리고 당시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른편 약간 높은 지대는 주차장인데, 그 위에 장판각이 있고, 그 옆에 관리사무소가 있다. 사적공원 맨 위쪽에는 우암이 제자를 가르친 서재와 사당이 있는데, 커다란 대문이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 명정문(明正門)이다. 명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마음을 곧게 쓰라는 뜻을 가진 강당 이직당(以直堂)이 있고, 오른쪽에는 모든 괴로움을 참아야 한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인함각(忍含閣)이, 왼쪽에는 마음을 밝고 맑게 쓰라는 뜻을 담은 명숙각(明淑閣)이 있다. 이직당 뒤편에는 매사에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는 의미를 가진 심결재(審決齋), 선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견뢰재(堅牢齋)가 있다.

이직당과 안함각(왼쪽)과 유물관.
선조 40년 사옹원 봉사를 역임한 수옹 송갑조((睡翁 宋甲祚 : ?~1627)와 어머니 선산 곽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난 송시열의 아명은 성뢰(聖賚)이고, 자는 영보(英甫)라고 하는데, 사실 그는 회덕현에서 가까운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9개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구룡촌은 금강이 충북 옥천 땅으로 물줄기를 감아 도는 곳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했던 우암은 8세 때부터 친척이자 동춘당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부여의 유학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에게 배우게 되었으나, 1년 만에 사계가 타계하자 그의 아들 김집(愼獨齋 金集)에게 사사하였다(2011.11.30. 부여 돈암서원 참조).
사계는 율곡 이이의 수제자였으므로 우암은 사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율곡의 학문과 사상을 전수 받게 되었으며, 김집에게 학문을 배우던 19살 때 한산이씨 이덕사의 딸과 혼인했다. 22살 때 부친을 여의고 3년 상을 지낸 27세 때, 인조 11년(1633) 우암은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경릉(敬陵 ; 세조의 장남으로서 20살에 죽은 세자 창의 능이 아들 성종이 즉위후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왕릉으로 격상하였음, 서오릉에 있음) 참봉으로 벼슬을 시작하게 되었다.
과거 당시 송시열의 답안지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가 아주 우수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문벌이 빈약하다고 장원으로 뽑기를 반대할 때 대제학으로서 시험관(지공거)이던 최명길의 강력한 주장으로 장원이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최명길은 병자·정묘호란 후 청을 반대한 죄로 끌려간 윤집, 오달제와 함께 3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이다.

탁월한 실력으로 관직에 나간 2년 뒤인 인조 13년(1635) 우암은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으나, 그 이듬해 12월 병자호란 때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으나 결국 삼전도 굴복으로 강화가 이루어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에 끌려가자 낙향하여 10여 년 동안 학문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우암은 자연스럽게 기호학파로서 사계 김장생을 이은 서인 기호학파의 지주자리를 이어받게 되는데, 1649년 인조가 승하한 뒤 봉림대군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자 우암은 장령(掌令 : 정4품) 으로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김자점 일파가 북벌을 도모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함으로써 우암을 비롯한 북벌 추진세력이 모두 실각하는데, 1655년 어머니 한산 이씨가 죽자 3년 상을 치른 뒤인 1658년 9월 출사하여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약8개월 동안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북벌계획을 주도하였지만, 이듬해인 1659년 5월 효종이 갑자기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을 비판하던 남인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때 갈등의 원인은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의 차이가 아니라, 효종의 장례와 대왕대비인 조대비의 복상(服喪) 문제라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러나 복제는 성리학을 치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으로서는 성리학에 근거한 오례가 국가정책 이상의 중요한 문제였다.

우암영정(왼쪽)과 담비옷.
현종 즉위 후 우암은 이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현종이 당쟁을 완화하려고 허적, 허목·윤휴 등 남인을 기용하자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다가 1664년(현종 5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의 상을 당하여 또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대립하게 되었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의 장례 때 어머니의 상복기간에 관한 대립이었다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의 장례 때 시어머니의 상복기간에 관한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자 우암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된다.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여 다시 복상문제로 대립한 2차 예송논쟁(1674) 때 남인이 승리하여 우암은 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숙종 5년(1679)에는 거제도·덕원 등지로 전배되었는데,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 중추부사 겸영경연사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 15년(1689) 남인과 가까운 장희빈 소생의 균(?)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계에서 은퇴했던 우암 등 서인이 반대상소에 제주도로 귀양을 갔는데, 그 해 6월 친국을 받기 위해서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으니, 이때 그의 나이 83세이었다.

숙종 20년(1694) 궁녀 최씨가 왕자(후에 영조)를 낳자 남인과 장희빈이 추방되는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우암의 관직이 복구되고, 문정공(文正公)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주자대전답의(朱子大全剳疑)·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어류소분(語類小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考)·심경석의(心經釋義)등 100여 권이 있는데, 후에 정조는 우암의 저서들을 주자대전(朱子大全)과 같으니,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고 명할 정도였다.
우암은 낙향하는 동안 속리산 화양계곡에서 칩거했는데, 중국의 무이 9곡(武夷九曲)을 본떠서 제1곡 경천벽(敬天璧)·제2곡 운영담(雲影潭)·제3곡 읍궁암(泣弓巖)·제4곡 금사담(金沙潭)·제5곡 첨성대(瞻星臺)·제6곡 능운대(陵雲臺)·제7곡 와룡암(臥龍巖)·제8곡 학소대(鶴所臺)·제9곡 파천(破天) 등을 화양9곡(華陽九曲)이라고 했다. 우암은 개울물이 맑아서 모래가 금가루처럼 보인다고 하는 제4경 금사담에 서재를 짓고 살았으며, 사후에도 괴산군 청천면 이곳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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