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대 임금 세종의 둘째아들로서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임금이 된 수양대군을 반대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다가 처형된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이개(李豈), 유성원(柳誠源), 박팽년(朴彭年) 등 집현전학사 출신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고 하는데, 동구 가양2동 대전보건대학과 우암 송시열을 기리는 우암 사적공원 앞 주택가에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 선생의 유허지가 있다(대전시기념물 제1호).
박팽년 선생의 유허지는 역적의 집이라 하여 모두 파헤쳐진 채 빈 터에 유허비만 세워져 있는데, 유허비는 선생이 옥사한 뒤 200여 년이 지난 현종 9년(1668) 충청도 유림들을 중심으로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현종 13년(1672)에는 비각을 지어 장절정(壯節亭)이라 했다.
박팽년 선생은 숙종 17년(1691) 명예가 회복되고,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로 추증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복원은 없다. 비각도 6·25 때 파괴 되었던 것을 16대손 박상동씨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대전시 동구 가양2동 대전보건대학과 우암 송시열을 기리는 우암 사적공원앞 주택가에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패년 선생의 유허지가 있다.
본관이 순천, 자를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라고 하는 박팽년은 조선 태종 17년(1417) 지금의 대전 동구 가양동인 회덕현 흥농촌 왕대벌에서 박중림(朴仲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취금헌이란 호는 평소 가야금 타기를 좋아했던 박팽년 스스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세종시 전의면 관정리 대부마을에서 태어난 아버지 박중림은 세종 때 세자이던 문종의 사부를 역임한 대학자로서 전라·경상관찰사와 사헌부 대사헌(종2품)을 지냈는데, 박팽년과 함께 처형된 성삼문과 하위지도 그의 문인이다.
박팽년은 18세 때인 세종 16년(1434) 알성문과 을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가 되었는데, 성삼문과 더불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에게는 왕자가 18명이 있었는데, 그 중 왕비 심씨 소생은 세자 문종·둘째 수양대군, 셋째 안평대군(瑢:1418~1453) 등 이었다.
세종은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술자리를 베풀면서 무릎 위에 앉힌 어린 세손(단종)을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했는데, 세종의 사후 장남인 문종(1450~1452)이 즉위하였으나 2년 만에 39세의 나이로 죽자 12세의 어린 왕자가 단종(1453~1457)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국왕의 잇단 서거와 어린 임금의 즉위로 왕권이 크게 쇠약해지고 중신들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세종의 둘째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 등 각 대군들은 경쟁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에게는 대체로 무인들이 많았고, 안평대군 측에는 문인들이 많았는데, 특히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고도 불린 안평대군은 김종서 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6진을 개척할 때, 공을 세우는 등 문무에 능하고 평판이 좋았다.
안평대군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 한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 10월(1453)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좌의정 김종서(1390~1453)를 죽인 뒤 그가 모반하려 하여 제거하였다고 둘러대고, 이어서 영의정 황보인·우의정 정분을 죽이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나중에 죽였는데, 이것이 계유년(1653)에 벌어진 계유정란이다.
영의정이 된 수양대군은 정권을 장악하더니, 1455년 2월 단종을 폐하고, 1456년 6월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여 노산군으로 강등시켜서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낸 뒤 다시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임금이 임종 때에 세자 또는 신임하는 대신들에게 남기는 말을 고명(顧命)이라고 하는데, 구두로 전하는 것을 유명(遺命) 또는 유훈(遺訓)이라 하고, 문서로 전하는 것을 유조(遺詔) 또는 유교(遺敎)라고 한다. 고명을 받은 신하들은 고명대신 또는 고명지신이라 하여 뒤를 이은 임금이 중히 여겼는데,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단종의 보호를 당부 받은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은 고명지신을 자임하여 자긍심이 높았다.
1455년 2월 세조가 즉위할 때 부제학이던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세조 즉위 직후 고향인 충청감사로 있다가 이듬해인 1456년 형조참판이 되어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명 사신의 환영회 잔치를 기회 삼아 세조를 시해하려던 거사는 김질(金礩)이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밀고하여 복위음모가 발각되었다.
단종복위 음모가 발각되자 체포된 박팽년의 재능을 평소 잘 알고 있던 세조는 그를 회유하려고 노력했으나 불응하자 심한 고문 끝에 옥사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분을 못 이긴 세조는 박팽년의 시체를 꺼내 사지를 찢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 박중림을 비롯하여 박인년(朴引年 : 정5품 校理)·기년(耆年 : 정6품 修撰)·대년(大年 : 정7품 博士)·영년(永年 : 정5품 正郞) 등 박팽년의 5형제와 아들 헌(憲)·순(珣)등 박씨 일족의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어머니를 비롯하여 아내, 제수 등 여자는 모두 공신들의 노비로 삼았다. 박팽년의 아내는 박팽년의 친구이던 정인지 집의 종이 되었다.

그래도 세조는 박팽년을 가리켜서 ‘당대지난신 만세지충신(當代之亂臣 萬世之忠臣)’이라고 하여 그의 충절을 높이 칭송했는데,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소에 무덤이 있다. 세조 즉위 후 사육신을 밀고한 정창손은 2등공신, 김질은 3등공신으로 상을 받았다.
세상에서는 집현전학사 중 성삼문은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없고, 하위지는 소장(疏章; 상소문)과 대책에는 능하지만 시를 알지 못하고, 유성원은 타고난 재주는 숙성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는데, 박팽년의 성품은 어질고 착했으며 말이 적지만 한번 세운 뜻은 무슨 일이 있어도 꺾지 않은 품성으로 ‘모든 집현전 학자들의 집대성’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시를 비롯하여 경학, 문장, 필법 등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한 박팽년이었지만, 역적으로 참화를 당해서 그의 저술은 전하지 않는다.
박팽년의 조부 박안생(朴安生)의 묘소도 세종시 전의면 송정리 중소골 마을에 있고, 부친의 묘소도 관정리 박동마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박팽년 선생 비각.
그런데, 한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사흘 만에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해로 밀항했던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살해당한 뒤, 조선으로 운구된 시체를 반역자라 하여 능지처참된 공주시 정안면의 김옥균 생가지도 박팽년 선생 유허지와 마찬가지로 폐허이지만, 박팽년은 조선 숙종 때 복위되고 벼슬까지 추증되었다. 물론, 김옥균도 갑오경장 후 총리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 등의 상소로 사면복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폐허로 방치하고 있는 것은 한번쯤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광해군 때 반역자로 처형당한 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한 인물이었는데도,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의 경포호 변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그의 작품 홍길동전을 비롯하여 누나 허난설헌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기념관과 동상까지 세워진 것을 생각하면, 박팽년 선생 유허지 일대를 개발하여 인근의 우암사적공원과 연계하여 널리 충효정신을 배우게 할 교육현장으로 할 필요가 있다(2013. 1.23. 우암사적공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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