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8문장가' 중 한사람인 송익필 서출이란 이유로 벼슬에 오르지 못해

원윤공파(元尹公派:고려때 종친(宗親)에게 주던 정2품 작호)에서는 송익필(宋翼弼)이라는 거유(巨儒)를 배출했다.
송익필은 선조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8문장가 중 한사람이었던 구봉(龜峯) 송익필, 송익필에 대해 일찌기 율곡 이이는 “성리학을 말할 만한 사람은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뿐이다”고 극찬했다.
송익필(호는 구봉)은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문하(門下)에 사계 김장생,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 정엽(鄭曄), 서성, 정홍명, 김반(金槃) 등의 학자를 배출했고, 특히 사계 김장생의 예학에 학통을 잇게 하여, 조선시대 예학의 종주(宗主)를 이뤘다.
여산송씨의 5파중에서 원윤공파는 전라도 고흥(高興), 밀직공파는 경상도 영덕(盈德), 소윤공파는 전북 부안(扶安)·익산(益山), 지신공파는 부안, 정가공파는 경기도에 집성촌이 있으며, 2000년 인구조사에서 여산송씨는 총7만 2763가구에 23만 2753명으로 송씨의 37%를 차지했다.
한편 여산송씨족보(礪山宋氏族譜)는 1606년(선조 39)에 송언신(宋言愼)이 편찬해 1610년(광해군 2) 송일(宋馹)이 청주에서 1책으로 간행하였고, 서기 1653년(효종 4)에 송희업(宋熙業)이 보완해 상·하 2책 226장으로 편찬 간행한 것으로, 1991년 4월 경기유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됐다.
여산송씨 족보는 본편 외에 추록(追錄) 2권이 있으며, 시조 송유익(宋惟翊) 이하 19대까지 기록돼 있다. 적서(嫡庶)는 구분했지만 남녀를 구별하지 않았고, 출생순서에 따라 기록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중엽까지도 ‘장자상속제도’가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서이다.
또한 딸의 후손도 4대까지 기록하였으며 이는 18세기 이후의 족보와 비교할 때 당시 남녀차별이 덜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양자 입양 사실에 관해서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14대 이후부터 기록돼 있다. 이로써 17세기 이후에야 양자제도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여산송씨 문중의 가족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 족보는 한 면을 세로로 6칸으로 나누어 기록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족보 가운데 17세기 이전의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희귀본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여산송씨 제주도 입향 현황>
여산송씨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아들인 송숙문(宋淑文)이 정당문학(종2품재신)이 되고 송숙문의 손자인 송송예(宋松禮)가 문하시중(종1품정승)에 오르고 여양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진 후 가세가 창성하기 시작했다.
여산송씨의 파계(派系)는 판서공계(判書公系)의 원윤공파(元尹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와 양의공계(良毅公系)의 지신공파(知申公派), 정가공파(正嘉公派)로 나누어졌다.
①송자보(宋自寶)는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16세손으로 중종 말기에 세계(世系) 분쟁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이를 피해 제주에 입도해 제주시 오라동에 정착했다.
②송남(宋楠)은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13세손이며 중시조 송련(宋憐)의 8세손이다. 전라북도 여산에서 출생했고 통정대부(정3품당상관 품계)로 첨지정언(僉知正言)을 역임했다. 153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제주에 낙향하여 제주목 화북리에 정착했다.
③송우홍(宋遇弘)은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16세손이며 정가공 송서(宋瑞)의 11세손이다. 통정대부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당상관)를 역임했다. 1705년(숙종 31)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제주목 화북리에 입도 정착했다.
④송신양(宋愼良)은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17세손이며 송서(宋瑞)의 12세손이다. 전라북도 여산에서 출생하였으며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품계)로 옥구호장(沃溝戶長)을 역임했다. 1765년(영조 41년)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제주목에 입도 정착했다.
⑤송이존(宋以存)은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17세손으로 1657년(효종 8) 대정현 안성리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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