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
한남대 명예교수

‘몰염치’와 ‘먹통’. 이 두 말은 어떤 시정잡배나 모리배를 일컬어 시중에 떠도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최고 권력을 가지고 모든 국민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대통령을 두고 하는 말이라서 슬프다. 하나는 이제 곧 떠나야 할 사람이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형을 사는 사람들을 사면한 것과 측근들에게 훈장을 무더기로 주었다는 것에 대하여 하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이제 곧 새롭게 들어와 앉을 사람이 검증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총리후보나 다른 중요한 직책에 앉을 사람을 지명하였다는 것에게 던지는 말이라서 슬프다. 그런 말을 듣는 그 인생이 불쌍하고, 그런 말을 용인하는 이 사회가 안타까워서 슬프다.

몰염치란 다른 말로 하면 파렴치요 염치를 모르거나 염치가 없다는 말이다. 염치는 ‘청렴하고 깨끗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할 때 얼마나 슬픈 일일까? 사람이 사람되게 하는 근본 되는 점의 하나는 바로 이 부끄러워서 차마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맘이다. 그것이 없으면 자리가 높거나 낮거나, 가진 것이 많거나 적거나, 배움이 크거나 작거나를 따질 것 없이 인간 말종에 속한다. 그런데 정권 말기에, 그것도 한 달도 못되어 그 자리를 내어 줄 사람이 다 된 밥에 재뿌리듯이, 빤히 바라보는 맑은 눈에 모래 뿌리듯이 모든 것을 한 방에 후질러 놓고 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프고 슬프다. 욕먹을 모든 것을 내가 다 짊어지고 가겠다는 그 맘이 가상한 것이지만, 그 동기와 내용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 슬픈 맘에 원망과 분노와 좌절감을 넘어 그의 인생 그 자체에 대한 비애감이 들어서 슬프다. 그가 할 마지막 염치행위, 즉 자기를 도운 사람들에 대한 염치를 세우기 위한 권한 행위라고 하겠지만,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주 낮은 단계의 조직의리에 지나지 않은 행위를 보는 듯하여 매우 슬프다. 그 동안 그렇게 몰염치하게 하였지만, 마지막은 그래도 염치를 살려 주기를 바랐지만, 그 마감 바람마저 뭉개버렸다는 것보다도 그런 한 가닥 희망을 가졌었다는 것이 참 슬프다. 그렇게 크게 잘못한 사람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됐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들을 ‘적법’한 조치를 할 뿐이라고 억지를 쓰면서 사면을 하였을 때 얼마나 냉혹한 인심이던가를 읽지 못하는 그 자리 그 사람이 슬프다. 공인으로 그렇게 몰염치한 일을 할 때, 우리 사회에는 몰염치가 사회문화로 가득히 들판의 풀처럼 무성히 자라나게 될 가능성을 빤히 보게되어 슬프다. 후질러 놓고 가는 그야 그렇게 가면 그만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남기는 사회기풍은 얼마나 몰염치한 것들로 가득하게 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할 때 슬프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먹통이라고? 불통이요, 깜깜이란다. 이 말은 국어사전에서 ‘바보, 멍청이’와 통하는 것이면서 경상도에서는 ‘귀머거리’란 뜻으로도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꽉막혔다는 것이다. 이해도 안 되고, 남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만 세우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이제 선거가 끝난 지 겨우 한 달 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선거운동할 때 모든 세상의 소리를 다 듣고, 모든 세상의 것들과 다 터놓고 말을 나누고 맘을 나눌 것같이 하더니, 되는 순간부터 바로 그에게 주어진 별명이 ‘먹통’이요, ‘깜깜이’라니 참으로 슬프다. 그렇게 살아서 그런가? 그렇게 태어난 것인가? 그런 그를 미리 알아서 판단하지 않고, 덥썩 뽑아놓고 답답해하는 것이 슬프고, 그를 내세운 당에서도 먹통처럼 깜깜한 그 속을 서로 드러내지 않고 눈치만 슬슬 보고 있을 뿐, 바른 소리로 조언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슬프다. 그 먹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그렇게 다른 사람과 통하지 않고 깜깜이로 혼자 한다는 인식이 모든 사람에게 들게 할까? 필요없이 소문이 나도는 것이 싫어서, 보안을 철저히 하려고 그런단다. 한 편 이해되고 수긍이 간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 드러나게 될 일을 왜 미리 청명하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먹통같이 깜깜이로 하는 그들의 몇몇 참모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란 것일까? 그 생각과 행동이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라서 참으로 슬프다.

이 두 가지가 다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절대군주가 통치하던 때, ‘짐은 국가’라는 낡은 의식과 권위주의시대의 절대권을 가지고 휘두르던 독재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지 않을까? 그 때의 염치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방법은 당연히 민주시대의 그것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물론 그 시절 그 때를 살았던 사람들이나, 지금을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위장전입을 하였거나, 병역을 부당하게 면제받았거나, 상속세나 증여세를 피해가려고 한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그 숫자가 많고 관행이라고 해서 옳고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기에 법으로 만들었고, 여론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닌가? 깔끔하고 깨끗한 사람만 골라 쓰라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깨끗하지 못한 사회가 맑고 밝은 것을 요청하는 것은 바로 된 시대의 흐름 아닌가? 그런데 ‘먹통’ 인선을 옹호하기 위하여 ‘신상털기’ 식 청문회나 여론검증이 문제가 있다고 하는 발언은 부정한 사회흐름을 공식화하자는 것과 같은 시대를 거꾸로 가자는 위험한 말로 들려서 아주 슬프다. 미리 맑고 깨끗한 물이나 유리처럼 투명하게 일하는 풍습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대통령은 자기 아집과 버릇을 부정하고, 민중과 시대를 긍정할 때 슬픔은 사라지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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