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만인산 봉수샘서 발원 해방 이후 피란민 생활 터전

2010년 최첨단 다리로 변신 가압펌프장 설치로 수질 개선

1960년대 이후 산업화를 거치면서 울산, 포항, 광양, 일산, 성남, 분당, 세종 등 수많은 신도시가 건설되었지만, 대부분의 도시는 삼국시대 이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분지에 터를 잡아 형성된 고대도시이다. 그러나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거세지던 1905년 5월25일 회덕현과 진잠현의 중간을 흐르는 대전천변 한산한 농촌인 공주군 산내면 한밭마을에 경부선 철도의 대전역을 세우면서 태어난 대전은 고작 1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넓은 들'이라는 순우리말 '한밭'의 한자표기인 대전(大田)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조선 세종(1418∼1450)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인데, 동국여지승람은 "대전천은 유성현에 있으며, 그 동쪽 25리쯤에 있는 전라도 금산군(필자 주; 금산군은 오랫동안 전라북도의 관할이었으나, 1963년 1월 충청남도 관할로 변경되었다) 경계에서 발원한다. 전라도 진산현에서 발원한 유포천(柳浦川 = 유등천)과 연산·진산 2고을의 경계에서 발원한 성천(成川) 등 3개 하천이 회덕현에서 합류하는 것이 갑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밭’이라고 불린 지역은 대전역과 대전천 사이 즉, 지금의 정동, 중동, 원동 일대를 말하는데, 경부선 대전역과 1911년 7월 개통된 호남선 서대전역과의 사이에는 대전천이 흘렀다.

목척교 전경 모습.
대전천은 대전과 금산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만인산(萬仞山:537m) 동쪽 봉수레미골의 임간교육장 위쪽에 있는 봉수 샘에서 발원하여 만인산자연휴양림과 산내를 거쳐 대전 시내를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데, 대전천의 발원지 만인산에서 약23.5㎞을 흘러서 대전역을 지나 중촌동 부근에서 갑천의 지류인 유등천과 합류한다.
대전천은 동구와 중구를 가르는 경계선이자 오랫동안 서울의 한강처럼 대전의 중심을 지나는 중심하천이었으나, 1989년 1월 대전시가 인접한 유성읍과 신탄진읍을 흡수하면서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충청남도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서울의 청계천 수준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한편, 금산군 진산면 삼가리 인대산(666m)의 남쪽 건지실 골짝의 당집 위 "건지 샘"에서 발원하여 인대산을 동쪽으로 돌아서 금산군 진산면과 복수면에서 삼계천, 진산천, 금상천 등과 합류하여 44㎞를 흘러 삼천동에서 대전천과 합쳐지는 유등천은 버드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중구와 서구의 경계를 형성한다.
또, 논산시 벌곡면 수락리의 대둔산(877m) 수락골 암자 터 부근의 "신선 샘"에서 발원하여 수락계곡의 선녀폭포를 내려와서 벌곡천, 두계천, 매노천과 합류하고 대전에 들어와서 진잠천, 유등천과 합류하는 107.7km에 이르는 갑천은 예전에는 대전과 유성읍의 경계가 되었지만, 1993년 여름 갑천변을 중심으로 대전 EXPO박람회가 개최되는 등 대전의 중심하천이 되었다.

목척교 아래 만연하게 핀 코스모스(왼쪽)과 유채꽃.
153만 시민이 살고 있는 국내 제7위의 거대도시 대전은 동으로 계족산 능선이 길게 뻗어 식장산에 이르고, 남으로는 보문산과 구봉산이, 서쪽으로 빈계산, 금수봉, 도덕봉의 능선과 산길로 이어지는 분지 안에서 대전천, 유등천, 갑천을 아우르고 있는데, 옛 홍명상가 맞은 편 대전천 둑 밑에는 오래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은행나무마을’이라 하여 으느정이(銀杏洞)이라 하고, 으느정이 북쪽 옛 중앙데파트 일대를 목척 마을(木尺里)이라고 불렀다.
목척리와 으느정이 사이의 대전천에는 오래 전부터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목척리란 대전천의 징검다리를 오가던 새우젓장사가 세워놓은 지게가 마치 나무로 만든 자의 눈금과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대전역이 세워지고 대전에 일본인 거류민이 증가하자 일제는 1912년 제방공사와 함께 폭5.4m, 길이 70m의 나무다리 목척교를 놓았는데, 목척교는 자동차 2대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정도였다. 1932년 오랫동안 지방행정의 중심도시로서 위상을 공고히 해온 공주읍에서 충청남도청을 옮겨올 때 목척교는 시멘트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
1970년대 고속도로가 개통될 때까지 육로교통의 중심은 철도이었는데, 8.15 해방과 6.25.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철도교통의 중심지인 대전에 모여들어 급속하게 팽창했다. 대전천을 따라 먹거리 장터며 입을 것이 부족해서 밀매되는 군복을 염색하는 염색공장 등이 모여들었고, 대천변의 빈 땅에는 판잣집과 함께 장작을 팔거나 보신탕을 파는 식당 등을 쉽게 볼 수 있는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 영향으로 지금까지 대전천변에는 서민들의 먹거리를 파는 음식점이 즐비한데, 대전천은 아낙들의 빨래터이었고, 여름철이면 어린이들의 수영장이 되었다.

1910년대 대전역 전경(왼쪽)과 목척교 유래비.
대전은 대전역과 대전천의 영욕을 함께 하며 성장했는데, 1960년대 개발경제시대를 맞으면서 대전천은 교통과 주거의 불편대상으로서 복개되거나 하상에 지지대를 세워서 거대한 빌딩을 짓는 행위를 서슴지 않아서 1974년 대전역 앞의 대전천을 복개하면서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가 세워졌다.
그러나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과 함께 시민의식이 성장하여 도심 한복판을 흐르는 대전천을 시민들의 산책과 휴식공간으로 이용하고, 피라미와 송사리 등 먹이를 찾아 백로와 오리 떼가 날아오는 생태하천으로 만들기를 바라는 요구가 높아지자, 대전시에서는 으느정이를 젊은이들의 거리로 만들고, 2005년부터 시내 중심부를 관통하는 3대 하천의 생태를 복원하는 행복한 하천 만들기 프로젝트로서 오랫동안 대전천의 흐름을 막았던 홍명상가 건물을 2008년에, 그리고 2009년 여름에는 중앙데파트를 각각 해체했다.
2010년 8월에는 애당초 나무로 다리를 놓았던 대전천의 목척교를 상징하여 나무의 조직세포를 형상화한 새로운 디자인의 다리를 개통했는데, 길이 72.8m, 폭 35.8m의 새로운 목척교는 나무 줄기세포를 상징하는 조형물 이외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해서 야간에도 조명이 가능한 최첨단 다리로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1년 내내 맑은 물이 흐르는 대전천을 만들기 위해서 한밭대교 부근에 145m의 취수여울과 가압펌프장을 만들어서 끌어올린 물과 대청호 물을 8.7㎞ 상류인 옥계교까지 올려 보낸 뒤 흐르게 하여 1년 내내 수심 10~30㎝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역사를 하기도 했다.

한편, 날로 확대되는 도시와 격증하는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전천 양쪽 둔치에 만들었던 하상도로를 둘러싸고 원도심의 열악한 주거환경과 수변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했다며 철거를 주장하는 환경단체와 여론에 밀려서 하상도로도 점점 폐쇄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도심의 교통체증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지 못한 채 하상도로를 폐쇄하는 조치에 일부 시민들로부터 더 큰 불만을 받고 있다. 또, 금산 옛길을 거쳐 상소동산림욕장, 길게는 만인산휴양림까지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는 이미 자전거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 코스로 자리 잡았으며, 이른 봄이면 노란 유채 꽃밭이, 가을이면 파란 하늘을 향해 한없이 손짓하는 코스모스 꽃밭이 시민들의 여유와 휴식공간이 되어주는 노력을 외면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대전천변이 서울의 한강변처럼 양안에 준고속화도로가 만들어지고, 둔치에는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체육시설과 놀이시설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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