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 송준길 "봉황 춤추는 산" 백제 군사요충지 보문산성 복원

괘불·석조 등 문화재 다수 보유 ··· 청년광장서 둘레산길 1구간 시작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1980년대 정부대전청사와 대덕연구단지 조성으로 국내 제7위의 대도시로 성장한 대전은 1993년 대전 엑스포를 계기로 더욱 발전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도심의 중심이 둔산 신도시로 이동하면서 대전역과 서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의 공동화 현상을 맞았다. 아직까지 원도심 거주 시민들의 공허함이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2012년 말 충남도청마저 내포신도시로 떠남으로서 더욱 마음의 상처가 큰 원도심에는 서울의 남산처럼 대전의 상징이자 시민의 휴식처인 보문산(寶文山; 시루봉 457m)이 있는데, 시루봉에서는 맑은 날이면 멀리 계룡산, 대둔산, 서대산, 속리산까지 보인다.
보문산은 5·16 이후 시민공원으로 지정되어 동물원과 전망대를 짓고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개발이 이루어졌으나, 난개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연공원으로 크게 변신하고 있는 중이다.

보문산은 불교적 색채를 띤 지명이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는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그중 하나는 착한 동생과 심술궂은 형에 얽힌 이야기이다.
아득한 옛날 이곳은 평평한 들판으로서 늙은 부모와 두 아들이 살았는데, 형은 일하기를 싫어하는 주정뱅이였고, 동생은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장에 팔아 부모를 봉양하는 마음씨 착한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동생은 산에 가서 나무를 지게에 가득 짊어지고 내려오는데, 조그만 옹달샘 옆에 이르렀을 때 물고기 한 마리가 길가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동생이 잠시 멈춰서 물고기를 집어서 샘물에 넣어주자, 물고기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파란 주머니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동생이 그 주머니를 집어서 살펴보니, 주머니 겉에는 ‘은혜를 갚는 주머니’라는 글자가 씌어 있고, 그 주머니를 사용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동생은 “혹시나?” 하며 적힌 대로 동전 하나를 주머니 속에 넣었더니, 동전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해서 금세 큰 부자가 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욕심 많은 형이 동생에게 그 파란 주머니를 한번 만져보자고 하여 동생이 건네준 주머니를 받아들고 구슬을 넣는 척하다가 달아났는데, 동생이 쫓아가며 돌려달라고 해도 도망가던 형이 넘어지면서 주머니를 땅에 떨어뜨리게 되었다. 그 순간 주머니 속으로 흙이 들어가자 금세 주머니 속에서 쉴 새 없이 흙이 나와서 큰 산을 만들게 된 것이 곧 보문산이라고 한다.
본래는 산 속에 복 주머니인 보물이 묻혀 있다고 해서 ‘보물산’이라고 불렀던 것을 언제부턴가 보문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문산성(왼쪽)과 보문상 장대루.
또 다른 전설은 아주 오랜 옛날 보문산 기슭에 아들 5형제를 둔 농부가 살았는데, 자식들이 모두 결혼하여 분가하고 늙은 아버지 혼자 살게 되었다. 어느 해 여름철에 날씨가 몹시 가물어 연못에는 물 한 방울이 없도록 말랐는데, 농부는 말라죽어가는 두꺼비 한 마리를 보고 불쌍하게 여기고 물을 떠다 주니 두꺼비는 물을 마신 뒤에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 다음해에도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농부가 연못에 나가니 작년의 그 두꺼비가 나타나서 접시 하나를 농부 앞에 놓고 사라졌다. 농부가 이상히 여기면서 접시를 가져와서 재떨이로 삼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접시에 담뱃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농부가 동전 한 개를 접시 위에 놓으니, 동전이 가득 차서 금방 큰 부자가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식들이 달려와 서로 접시에 탐을 내자 농부는 자식들의 욕심을 염려해서 접시를 뒷산에 몰래 묻고 돌아오다가 죽었는데,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접시를 찾았으나 영영 찾지 못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보물이 묻혔다하여 보물산이 보문산으로 불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촉사.
셋째는 옛날에 한 스님이 소제동 방죽을 지나가는데 논두렁에서 '우리 백성이 3년 가뭄으로 다 죽겠으니 우리 백성들을 살려주시오'하는 소리가 들려서 소리가 나는 곳을 살펴보니, 용왕이 부르짖는 소리였다. 스님이 물고기들을 모아서 물 있는 곳으로 옮겨주니, 용궁의 왕은 스님에게 고맙다면서 복조리 하나를 주었다. 스님이 복조리를 받아서 망태에 넣고 보문산 근처까지 오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불빛이 보이는 집을 찾았다. 어느 낡은 초가집은 단칸방에 일곱 자식을 데리고 사는 과부가 있었는데, 과부는 스님에게 정성으로 저녁밥을 차려주었지만 자식들에게는 시래기죽을 주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언짢았다. 다음날 아침에 스님은 과부에게 그 복조리를 선물하고 떠났는데, 과부가 무심코 복조리에 쌀과 엽전을 넣었더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쌀과 돈이 나와서 큰 부자가 되었다. 복조리의 신통함을 알게 된 자식들은 서로 복조리를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이자 어머니는 복조리를 강변 모래밭에 묻어버렸는데, 그때 복조리에 모래가 들어가니 모래가 쏟아져 나와 큰 산을 이룬 것이 보물산, 곧 보문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전설과 달리 우암 송시열은 산의 형세가 마치 벌거벗은 여인네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곳을 지날 때에는 부채로 가리고 지나갔다고 하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우암의 숙부 동춘당 송준길은 그의 문집에서 ‘봉황이 춤을 추고 있는 산’이라 하여 보문산을 봉무산(鳳舞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민공원으로 지정되기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시민들의 휴식공간이던 보문산은 2002년 동물원을 사정동으로 옮기는 등 관람객이 크게 줄어들면서 보문산의 상징 같던 케이블카도 철거되었지만, 보문산 입구의 길목과 곳곳에는 수많은 무속인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등산로를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개관하자마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휴업상태인 수족관 아쿠아월드가 있는데, 5·16 이후 시립공원으로 개발하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을 지나 직진하면 정상인 시루봉으로 가고, 왼편으로는 야외음악당과 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전망대 오른편에 야외음악당이 있고, 2층 시멘트 구조물로 지은 전망대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매우 지저분할뿐 아니라 전망대에 올라가도 나뭇가지들이 시야를 가려져 시내를 바라보기 어렵다.

유엔균 참전기념비(왼쪽)과 보문산공원 건설공적비.
동물원이 있던 곳에 이르면 폐허가 되어 적막이 흐르고, 전승탑 앞에서부터 좁은 계단과 함께 보문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대전시에서는 2004년 9월부터 대전 주변의 둘레산길 개발에 나서서 보문산~ 식장산(598m)~ 계족산(423m)~ 빈계산(315m)~ 갑하산(469m) ~ 구봉산(264m) 약133㎞를 12구간으로 나눴는데, 보문산 청년광장에서 시루봉~ 헬기장~ 보문사지 갈림길~ 구완터널 상부~ 오도산~ 철탑~ 금동고개로 이어지는 약9.3km이 제1구간이다.
삼국시대부터 백제가 신라를 경계하던 국경지대이던 계족산, 식장산을 연결하는 산성들과 연결된 군사적 요충지였던 보문산 정상에는 자연지형을 따라 다듬은 돌로 쌓은 보문산성이 약300m 정도 남아있다. 발굴조사 결과 남문 터가 확인 되었으며, 현재 통행로로 이용되는 북문도 폭을 좁혀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대전시기념물 제10호). 또, 고려시대의 사찰인 보문사지에는 서문· 남문지, 남쪽 경사면에 축대를 쌓아 지은 터에 괘불과 석조가 있고(대전시기념물 제4호), 정상인 시루봉 밑 고촉사에는 미륵상을 닮은 자연암석이 특징이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