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대덕구 도리미 마을서 출생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서 활동

임정 탈퇴 후 무정부주의 신봉 한 평생 계몽·독립운동 '앞장'

단재 동상.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이후 우리 민족 말살정책으로서 창씨개명을 하고,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식민정치를 자행했지만, 10년만인 1919년 고종의 인산을 맞아서 거족적인 반일운동을 전개한 항일운동은 민족의식을 거양한 계기가 되었다.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 1880~1936) 선생은 우리 세대에 낳은 민족지도자 중 1인이지만, 사실 대전이 단재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간과하고 있다가 최근 뜻있는 시민단체의 관심과 노력으로 생가 터 표지석이 세워지고, 생가복원과 주변경관 정비 및 동산 건립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충청북도에서 일찍부터 단재가 9살부터 잠시 살았던 충북 청원을 중심으로 단재 선양사업을 벌이며 2009년부터 '충북을 빛낸 역사인물’로 선정하고, 신채호기념관과 단재 교육연수원을 설립하는 것을 비교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한말 항일독립투사이자 언론인이고 문필가, 사학자인 단재는 1880년12월 8일(음력 11월 7일) 지금의 대전 중구 어남동인 옛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리미 마을에서 아버지 신광식(申光植)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는데, 8살 때 아버지가 죽은 뒤 가족들은 외가인 도리미 마을에서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이사했다.
생가 도리미 마을은 대전 시내에서 대둔산으로 가는 635번 국도를 따라 가면 되는데, 대전시립동물원 앞에서 대둔산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약8km쯤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생가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작은 다리를 건너 2km를 가면 왼편에 있다. 외길이어서 초행자라도 실수 없이 갈 수 있지만, 행정구역이 대전시라곤 해도 대전동물원 입구를 지나서부터는 시골이나 다를 바 없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매우 불편하다.
마을에 들어서면 왼편에 담장도 없는 기와집 한 채가 아무런 설명문도 없이 달랑 있는데, 빈집 추녀 밑에 걸린 편액은 단재헌(丹齋軒)이라고 했다. 단재 생가와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을 대전시에서 지어 놓은 조금은 의아스런 건물이다. 그 앞에는 단재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개울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남서쪽 산기슭에 ㄱ자 형 초가집과 행랑채 한 칸이 있고(대전시기념물 제26호), 생가 앞에 단재의 동상이 있다. 생가 아래 담장 밖의 산기슭에는 작은 원두막 한 채가 있는데, 앞으로 기념비가 새워진 곳부터 생가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 생각이 아닐까 싶지만 너무 빈약한 현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청원군 고두미 마을로 이사 간 단재는 문과에 급제후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을 역임했던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가 차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10살 때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살 되던 1897년에는 학부대신을 역임한 친척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해서 당시 고명한 유학자로 알려진 성균관교수 이남규(李南珪)에게 배웠는데, 이 무렵 그는 독립협회에 소장파로 활약했다.
22살 때 성균관을 졸업한 뒤 향리 부근인 인차리에 문동학원(文東學院)을 세우고 신교육운동을 전개하다가 26살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지만, 1905년 8월 을사조약의 체결로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자 관직의 뜻을 버리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며 우리나라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단재는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1907년 항일결사조직인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에 활약했으며,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서호문답(西湖問答)’· ‘영웅과 세계’· ‘학생계의 특색’· ‘한국자치제의 약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이십세기 신 국민’ 등의 논설을 썼다. 또, 유명한 독사신론(讀史新論)·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을 연재했으며, 그밖에 이태리건국 삼걸 전을 번역하여 발행하기도 하고, 가정잡지의 발행에도 관여했다. 이때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과 민족의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영웅사관을 보여주었다.

단재 생가.
1910년 4월 신민회사건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여의치 못하게 되자 동지들과 평북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 칭다오로 망명한 단재는 안창호·이갑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그곳에서 항일단체인 권업회(勸業會)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는데, 1914년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만주와 백두산 일대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지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했다.
1915년에는 상하이로 옮긴 단재는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힘썼는데, 베이징으로 가서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을 창단하고,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장이 되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한 단재는 의정원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이승만과 의견충돌로 임시정부의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맞섰다. 단재는 임시정부가 소수의 의견만으로 좌우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직에다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반대했다.

생가지 안내판(왼쪽)과 생가현액.
단재는 1922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조선혁명선언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발표하면서 폭력에 의한 민중혁명을 주장했는데, 1922년 1월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도 임시정부 해체와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을 쟁취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렇게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의 임시정부 개조파와 대립한 단재는 베이징으로 옮긴 뒤 항일비밀단체인 다물단(多勿團) 조직에 가담하고,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했는데,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한 단재는 1927년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奪還)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 항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57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단재의 묘소는 고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마을 뒷산에 있는데, 1960년 종중에서 처음 사당을 건립했다가 197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980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기념사업회에서 사당에 ‘단재영각(丹齋影閣)’이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1993년 11월 5일 충청북도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어남동 도리미 마을은 허울뿐인 생가 복원과 동상, 유허비만 덩그마니 세울 것이 아니라, 단재의 민족사관을 전승할 청소년훈련원 같은 교육시설을 부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청원군 귀래리 마을과 중복되지 않는 내실 있는 기념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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