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소재 남분봉, 봉소루 짓고 후학 양성

조선 초 선비들 살림집 고스란히 보존

제자 위해 돌다리 올려 놓은 곳 '석교동'

대전 시내에서 금산 방면으로 17번 국도를 따라 충무체육관과 대전고등학교를 지난 부사동 네거리에서 약700미터쯤 가면, 도로 오른편에 조선 인조~현종 때 학자이던 봉소재 남분봉(鳳巢齎 南奮鵬: 1607~1674)이 세운 정자 봉소루(鳳巢樓; 대전시문화재자료 제35호)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보문산 등산로이기도 한 골목을 약70m쯤 들어가면, 오른편에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 고목이 작은 숲을 이루는 골목의 가파른 축대 위의 품격 있는 한옥 건물이 격자형 철제 울타리 안에 있다.
봉소루란 ‘봉황의 둥지’라는 의미로서 봉황처럼 크게 자라날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라 하여 지었다고 하지만, 보문산의 옛 지명이 봉소산이어서 보문산 기슭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라고도 하고, 봉소루 주위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많아서 많은 새가 날아오는 곳이어서 봉소루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또, 봉소루는 남분봉의 호 봉소재를 따서 봉소재라 불렀다고도 한다.

봉소루 10주련.
돌담에 백회를 바르고 기와로 덮은 담장 남쪽의 솟을대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안채와 오른쪽으로 앞면 1칸·옆면 2칸의 누(樓)가 있다. 안채에는 후손이 살고 있는데, 안채에는 윗방·대청·안방·부엌이 있다.
안채와 누가 붙어서 ㄱ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살림집은 홑처마 팔작지붕이지만 누각은 겹처마로서 정면과 우측을 트고 뒷면을 막았다. 이것은 내외를 하던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 안채가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봉소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인데, 왼쪽 단층 부분에는 2벌대의 기단석에 장대석을 깔고 덤벙 주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기단석 위에 돌기둥을 세워서 누각을 떠받쳤다. 서재 툇마루 오른쪽 끝에 2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봉소루 추녀 밑에는 송우용(宋友用)이 쓴 현판이 있다.

봉소루 전경(왼쪽)과 유허비각.
봉소루에는 봉소재의 10대손 남용구(南用九)가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를 판각한 유선시보(惟善是寶; ‘오직 착한 것이 보배다’는 대학의 일부 경구), 성균관 전의였던 박중근(朴重懃)의 호서승경(湖西勝景; 호서지방의 아름다운 경치), 방촌 남희우(南熙佑)의 산고수장(山高水長; 산은 높고 물은 길다) 등의 편액이 사방에 걸려 있다. 또, 덕령상설(德嶺詳雪; 덕고개에 쌓인 눈 구경), 고산효종(高山曉鐘 ; 고산사의 새벽 종소리), 안봉제월(案峰霽月; 안산봉우리의 밝은 달), 식장낙하(食藏落霞; 식장산의 지는 안개), 계산화운(鷄山花雲; 계족산의 구름), 문성반조(文城返照; 보문산성에서 비치는 햇살), 금병청풍(錦屛淸風; 금병산에서 들리는 맑은 바람소리), 고전관가(考田觀稼; 들판의 농사일 구경), 근시부연(近市浮煙; 가까운 저자거리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장천어화(長川漁火; 대전천에서 밤에 물고기를 잡는 횃불) 등 기둥에 네 글자씩 써서 걸어놓은 10주련이 봉소루의 품격을 말해준다.
지금은 주변에 많은 집들이 세워져서 시야가 가려졌지만, 당시에는 높은 곳에 위치한 봉소루에 오르면 대전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맑은 날에는 멀리 속리산, 덕유산, 운장산까지 바라볼 수 있는 명소였다고 한다.

봉소루 현판.
자를 숙우(叔羽), 호가 봉소재인 남분봉은 선조 38년 이곳에서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 종6품)를 역임한 고성 남씨인 부친 남혁(南爀)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출생했는데, 고성 남씨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남분봉의 고조부인 남신(南信) 때부터라고 한다.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 종8품)를 역임한 남신은 사림파의 태두 조광조(趙光祖), 충암 김정(沖菴 金淨) 등 신진사류들이 기묘사화로 처형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충청도 옥천으로 낙향하였다가 동생 남임(南任)과 함께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봉소재는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봉소루를 지어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현종 15년 67세로 죽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통정대부, 형조참의를 추증 했는데, 봉소루 뒤에 송병관이 비문을 짓고 이기복이 전각한 비문에는 조정에서 봉소재에게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정3품) 등 여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소루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높이 174cm, 폭 66.5cm인 남분봉유허비는 유허비각 안에 보호되고 있다.

유허비 전면.
사실 봉소루의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고, 봉소재가 병자호란 때 낙향한 이후인 현종 원년(1660년) 때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숙종 40년(1714년)과 영조 34년(1758년)에 각각 2층 누각에 팔작지붕을 중수한 기록이 있고, 근래에도 해방 전에 안채를, 1970년대 초에 봉소루를 각각 중수하였으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조선 초 선비들의 살림집 모습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봉소루 마당 한쪽에는 하마석 한 개가 있는데, 이것은 봉소재가 후학을 가르칠 때 이곳을 지나던 선비들이 말에서 내리고 오르던 디딤돌로 삼았던 것으로서 원래 봉소루에서 150m쯤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도로 확장 때 땅에 묻었던 것을 2008년에 발굴해서 옮겨 놓은 것이다.

고성 남씨의 집성촌이기도 한 석교동(石橋洞)이란 지명은 봉소재가 제자들이 매일 대전천을 건너서 배우러 오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 사재를 털어 튼튼한 돌다리를 놓은 뒤, 돌다리마을로 불리던 것이 한자화된 것이라고 한다.
봉소재와 석교동 돌다리에 얽힌 일화는 봉소재는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외에 틈틈이 낚시를 즐겼는데, 그는 잡은 고기를 먹지 않고 다시 물속에 넣어 주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봉소재가 대전천에 나가서 낚시를 하면서 유난히 빛깔이 고운 큰 잉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 평소처럼 잉어를 물속에 넣어주자 잉어는 주위를 맴돌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낮에 살려준 잉어가 나타나서 ‘이 냇물에는 변변한 다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건너다니기에 불편하고, 이곳에서 조금 내려가면 큰 바위가 있으니 그 바위로 다리를 놓으면 좋겠습니다.’ 하며 사라졌다. 이튿날 봉소재가 잉어가 가르쳐 준 곳을 찾아가보니, 정말 그곳에는 길이 15자, 폭이 4자나 되는 다리 형태의 큰 돌이 있어서 그 돌을 옮겨서 대전천 위에 놓았다. 봉소재는 사람들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다.

아름다운 전설과 대전 지방에 살던 고고한 선비의 역사를 말해주는 봉소루는 석교동 돌다리와 함께 대전이 자랑할 만한 유물이지만, 대전시의 문화재 관리 상태는 매우 소홀하다.
우선, 주택가 골목인 봉소루 주변은 가파른 축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지럽게 주차해 둔 차량들이며, 담장 안팎에 있는 느티나무 고목들도 노거수라는 표지석 이외에는 별다른 관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봉소루를 관람하기 위해서 대문 기둥에 붙어있는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수시로 찾아오는 방문객이 귀찮은지 아무런 반응이 없고, 솟을대문 한구석에 붙어있는 관리자 연락전화는 결번이라는 메시지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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