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聰氣) 좋은 옛 어르신들은 집안의 대소사나 가족 생일 등을 달력에 일일이 표기해 놓지 않고서도 죄다 기억해 냈다. 서당 문턱에 가보지 않았어도 축문을 줄줄 외워 잘 쓰시는 어르신들도 많았다. 요즘도 그런 분들이 많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삶의 지혜나 상식은 최고 학부를 나온 젊은이 못지않은 어르신들이 많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선현들의 가르침 또한 크게 배운 사람보다 오히려 훌륭하게 자녀 교육을 시키는 어르신들도 많다. 모두가 ‘건강한 정신세계’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총기 좋으시던 집안 어르신이 어느 날 갑자기 ‘기억 장애’가 오기 시작한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이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절망적인 낭패감이란 이루 형언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에게 ‘치매(癡?)’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부모님의 기억력이 쇠퇴한 것을 일컬어 ‘건망증’이란 표현도 쓰기가 죄송스런 일인데, 가슴 아프게 정신적 장애를 겪는 부모님에게 어찌 ‘치매’라는 말을 예사로 쓰겠는가. 치(癡)자, 매(?)자 모두 ‘어리석다’ 또는 ‘바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치매의 사전적 의미는 ‘정상적인 정신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를 이른다. 하지만 어른에게 함부로 ‘노망(老妄)’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치매’란 말도 역시 비슷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이 시대에 눈 먼 사람을 소경이나 봉사라 하지 않고 시각장애인이라 하고, 말 못하고 귀먹은 사람을 벙어리나 귀머거리라 하지 않고 언어장애자나 청력장애자라 하듯이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에게는 ‘치매’란 말을 함부로 쓰기 어렵다. 근심 어린 얼굴로 “기억 장애를 겪고 계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자식, 며느리, 손자녀의 도리란 생각이 든다.치매란 대뇌 신경 세포의 손상 따위로 말미암아 지능, 의지, 기억 따위가 지속적·본질적으로 상실된 경우를 말한다. 치매를 ‘질병의학’으로 구분해 놓은 ‘전문용어대역사전’을 보더라도 ‘기억장애, 판단장애, 추상적 사고의 장애 및 인격 변화 등을 포함한 지적 기능의 일반적 손실을 특징으로 하는 기질적 정신장애’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달 21일은 세계치매협회와 세계보건기구(WTO)가 정한 ‘세계치매의 날’이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중 치매환자는 47만 명으로, 100명당 9명꼴로 치매에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유병률 8.8%) 치매는 드문 병이 아니라 흔한 병이 되었다. 부모가 치매면 자식도 치매에 걸리는 이른 바 유전질환도 아니라고 한다. 얼마 전 TV ‘인간시대’에서 본 어느 30대 젊은 가정주부가 겪는 눈물겨운 ‘기억장애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완전히 고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근 치매약물도 많이 개발됐고 적절한 재활치료만 병행하면 치매의 진행속도를 늦추거나 정체시킬 수 있다고 한다. 증세를 초기에 발견하면 치료 가능성도 높고 중증으로 가는 것도 막을 수 있다는 게 전문의의 견해다. 한국치매협회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치매에 걸릴 확률이 1.5배 높아지고 과도한 음주 역시 뇌 세포를 파괴시켜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치매의 원인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 두 잔 정도의 적당한 음주는 오히려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우울증이 있으면 치매에 걸릴 확률도 3배나 높다니, 평소 육체적인 운동 못지않게 정신 건강을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장애를 겪는 어르신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중요하다.기억장애를 겪는 집안 어르신이 어쩌다 대문 밖을 나가면 온 식구가 찾아 나서야 한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어르신을 찾기 위해 길거리를 헤매 본 가정에서는 그 애끓는 심정이 ‘미아 찾기’ 못지않음을 이해한다. 급기야 동사무소 스피커를 통해 어르신의 인상착의까지 방송한다.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장애를 겪으시는 어르신을 각별히 잘 보살피는 집안에서는 평소 어르신의 저고리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새긴 ‘이름표’를 달아 드린다. 유년시절 내 가슴에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아주셨던 어머니. 노년에는 거꾸로 자식이 어머니 가슴에 이름표를 달아드린다. 일선 경찰관들이 순찰 중에 발견하면 내 집안 어르신처럼 가슴 아파하며 업어다 모셔 드린다. ‘기억장애’ 질환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