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존성서 끝까지 항쟁, 부흥의 꿈 키웠지만

정쟁에 휘말리며 항복 선언, 당나라로 망명

대륙서 백제 기상 펼치다 누명으로 눈감아

촉(蜀)나라의 강유(姜維)는 자신의 주군인 유선(劉禪)이 위(魏)나라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촉나라 재건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결국 눈을 감았다. 후세는 이런 강유를 가리켜 충절의 인물로 표현하곤 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국(亡國)이 되고 중국으로 끌려간 의자왕(義慈王)이 결국 붕어함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했지만 흑치상지는 다시 군세를 모아 여러 성을 되찾는 등 백제재건 활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는 후에 백제의 왕자인 부여융(扶餘隆)을 따라 당나라에 항복했고 나아가 백제 부흥군의 수도인 임존성(任存城·현 예산 대흥면 일원) 함락에 가담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흑치상지를 백제사(史)를 끝장낸, 배반의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흑치상지는 누구인가
흑치상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신당서(新唐書)’ 등에 서술돼 있을 정도로 기록이 많은 편이지만 그가 어디 출신인지, 생년은 언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신당서에서 흑치상지는 689년 10월에 눈을 감았고 그의 묘지명에는 60세에 운명을 달리했다는 기록을 추리해볼 때 무왕(武王) 31년인 630년 출생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묘지명을 보면 흑치상지에 대해 보다 자세히 기록돼 있다.

흑치상지 묘지명에 흑치 가문에 대해 “부근은 이름이 상지이고 자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夫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했는데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이고,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고 쓰여 있다. 즉 흑치가문은 흑치라는 지역에 봉해져 이를 성 씨로 삼고 가문 대대로 달솔이라는 관직을 지내 명망있는 가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백제부흥운동의 선봉자
기원 660년 당(唐)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13만의 대군을 이끌고 인천 앞 바다의 덕물도(德勿島)에 정박하는 동시에 신라의 김유신은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의 동부지역으로 진격했다. 당나라 군은 금강하구에 상륙해 결사 항전하는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현 부여)성에 이르렀고, 신라군도 계백(階伯)의 결사대를 무찌른 후 당나라 군과 연합해 사비성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백제는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660년 7월 13일 사비도성을 내주고 만다. 이에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했으나 당시 풍달군장(風達郡將)이었던 흑치상지는 세력을 거느리고 8월부터 본격적인 백제부흥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전에 의하면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해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돼 3만 명의 백제민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후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장군은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가 지키는 임존성 공격을 감행했으나 당시 임존성은 지형이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식량이 많았기 때문에 한 달 동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은 작은 목책(木柵)만을 깨뜨리고 신라로 되돌아갔다.

신라군이 철수하자 소정방도 660년 9월 3일 의자왕과 귀족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철수했다. 신라군과 당나라가 철수하면서 흑치상지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扶餘豊)을 백제왕으로 옹립한 후 부흥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 때 백제군은 흑치상지를 필두로 200여 개의 성을 되찾았고 한 때 사비성을 포위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백제가 다시 되살아나는 듯 싶었다.

◆무너져버린 백제부흥운동
성공적인 백제부흥운동이 한창이었지만 백제군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흑치상지와 함께 주류성(周留城·현 보령 청소면 추정)에서 백제군을 이끌던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사이에 갈등이 일더니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만 것이다. 또 복신을 좋게 보지 않던 부여풍이 이번엔 복신을 죽였다.

이 소식을 접한 나당연합군은 남은 백제군을 토벌키 위해 대규모 병사를 이끌고 백제군을 재차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흑치상지는 나당연합군의 총공세를 훌륭하게 막아냈다.

주류성 함락 이후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한 신라군은 군사를 되돌렸고 당나라만 남아서 몇 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당나라도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당나라의 황제인 고종(高宗)은 목표를 임존성이 아닌 흑치상지로 눈을 돌렸다. 흑치상지를 당나라에 항복시키겠다는 계책을 꺼내 든 것이다. 고종은 의자왕과 당나라에 항복한 부여융(扶餘隆)에게 흑치상지를 설득하라고 명했고 결국 흑치상지는 부여융을 따라 당나라에 항복했다.

충남 예산군 대흥명에 위치한 임종성.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한 후 흑치상지는 군세를 모아 이 성을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흑치상지는 여러 차례의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664년에 함락되고 말았다.
◆돌려세운 칼끝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백제 장군이었던 지수신(遲受信)만 유목민과 함께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에 당나라는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흑치상지에게 지수신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흑치상지는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임존성 공략에 나섰고 백제 잔존군을 모두 토벌하는데 성공한다. 지수신은 전투에서 패한 후 고구려로 망명하고 만다.

이 부분을 두고 역사가들은 흑치상지를 배반자로 평가하고 있다.

정확한 이해관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개인의 욕심 때문에 백제를 등졌다고 일부 역사가들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흑치상지 열전’의 기록과는 달라 믿기 힘들다.

흑치상지 열전과 ‘신구당서(新舊唐書)’에는 ‘상지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은혜가 있었고 여러 차례 받은 상품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긴 재물이 없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서술돼 있을 정도로 성품이 훌륭했기 때문에 사리사욕으로 인한 배신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흑치상지는 항복을 통해 당나라 내부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이어가려 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부여융이 웅진(현 공주)도독이 돼 백제의 고지(古地)에 대한 지배권을 위임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백제 국권을 회복하려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에 성공하지 못했고 백제사에서 그의 선택이 마지막 백제 부흥의 꿈을 짓밟았다.

지난 1929년 10월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망산(邙山)에서 아들인 흑치준(黑齒俊)의 묘와 함께 출토된 흑치상지의 묘비. 흑치상지의 업적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돼 있다. 소장위치는 중국 남경박물관이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승승장구하던 흑치상지, 누명으로 눈감다
부여융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간 흑치상지는 지금의 서안(西安) 부근에 해당하는 만년현(萬年縣)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흑치상지는 당나라 소속으로 여러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678년 흑치상지는 토번(吐蕃·현 티베트주변의 왕국) 정벌전에 나섰다. 하지만 당나라군은 토번군 공략에 실패하고 패퇴했으나 오직 흑치상지만이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을 무너뜨렸다. 또한 이후 계속된 토번과의 전투에서 흑치상지는 기마대를 이용해 번번이 토번을 제압했다.

흑치상지는 이어 서경업의 난을 평정하고 이다조(李多祚) 등과 함께 돌궐을 쳐서 격파하는 등 당나라의 위세를 제고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공로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흑치상지는 자국인보다 높은 연국공(燕然道)의 작위와 식읍 3000호를 받았다.

하지만 687년 돌궐 정벌에 나섰던 흑치상지는 동료장수였던 찬보벽의 패전으로 죄를 뒤집어쓰게 됐다.

찬보벽이 공을 탐내서 흑치상지와 함께 공을 세우라는 조칙을 무시하고 무리한 진격을 감행하다가 전군이 패몰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찬보벽은 목이 베였고, 흑치상지도 공을 세우지 못해 연루됐다. 게다가 간신 주흥(周興)이 흑치상지가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 뒤 689년 10월 9일 60세에 운명을 달리했다.

흑치상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10년 뒤인 699년, 흑치상지의 아들인 흑치준(黑齒俊)은 아비의 누명을 벗기고 묘를 북망산(北邙山)으로 옮겼다. 북망산은 대개 황제나 왕, 고위 관리직들이 묻히는 곳으로 흑치상지가 당나라에서 세운 공이 가볍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자료=강종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역사문화연구실장

독특한 이름, 흑치상지의 성씨유래

'흑치'의 뿌리는 예산 덕산

백제사에는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흑치상지(黑齒常之)만큼 이름이 특이한 인물도 없다.

성이 흑치인 상지는 조상이 흑치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성 씨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흑치가 어느 지역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흑치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흑치가 동남아시아라는 주장이다.

중국 ‘위서(魏書)’에 흑치국(黑齒國)을 언급했는데 이에 따르면 ‘일본에서 약 4000리 거리에 떨어진 지역에 흑치국이 있는데 배를 타고 일 년이면 갈 수 있다’고 서술했다.

흑치국이 동남아시아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일부 역사가들은 신당서에 찾는다.

신당서는 곤륜(崑崙: 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풍습 중 치아를 검게 하는 풍습, 즉 흑치(黑齒) 풍습을 간직하고 있고 이를 흑치국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일부 역사가들의 논리이다.

또다른 주장은 흑치가 바로 충남 예산 덕산면이라는 주장이다.

예산 덕산의 옛 이름은 ‘금물(今勿)’인데 이는 흑치의 또다른 지명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당시 黑(흑)은 今(금)과 발음이 유사하고 齒(치)는 ‘천(川)’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천은 또 勿(물)과도 같은 표현으로 쓰이므로 ‘흑치는 금물’이라는 근거가 성립된다고 일부 역사가들이 말하고 있다.

또 덕산은 흑치상지가 군사를 일으킨 임존성과도 매우 가깝기 때문에 ‘흑치는 예산 덕산’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아직 정확한 사실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흑치 가문이 바다 건너 백제에 도착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동남아시아의 역사서는 물론 민간설화에도 해당 내용이 전무하다는 점을 볼 때 흑치가 동남아시아라는 설은 근거가 부족한 상황이다. 때문에 흑치는 예산 덕산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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