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있어 좋다/나를 이뻐해주어서//냉장고가 있어 좋다/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강아지가 있어 좋다/나랑 놀아주어서//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된 ‘아빠는 왜?’라는 제목의 2학년 초등학생의 시다. 초등학생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오르는 대로 재미있게 그려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냉장고와 강아지보다 못한 아빠를 묘사한 글이고 보니 힘겹게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냉장고처럼 먹을 것을 주지도 않고, 강아지처럼 함께 놀아주지도 않는 아빠는 당연히 아이에게는 왜 있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가 맞다. 나름의 사연도 있겠고, 사실 여부도 정확치는 않아 섣부른 판단이 조심스럽지만 도대체 무엇을 하느라 아이에게 이렇게 점수를 얻지 못했는가 싶다. 아이는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먹으며 자라나기에 어느 한 쪽이 아닌 부모 모두로부터의 균형 잡힌 애정과 관심은 자식이 훌륭히 성장하는 데 뛰어난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아이에게 사랑으로 다가서지 못해 혹독한 평가를 받는 아버지들에게는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심오한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는 물론 가정에서조차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처진 어깨를 간신히 추스르고 있는 참 불쌍한 오늘의 아버지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비록 초등학생의 시각이긴 하지만 자식들이 느끼는 오늘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 투영된 것은 아닌지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 없다. 가부장제 가정에서 큰소리 떵떵 치며, 가족에게 호령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근엄한 아버지상을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이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단출한 세대, 가정의 행복과 화목이 최우선 가치로 평가되는 21세기 이즈음에 그런 모습을 꿈꾸는 것 자체가 오만이며, 시대착오적 발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땅의 아버지, 그들의 고단한 삶도 들여다봐야 하며, 따뜻한 격려 또한 필요하다. 구조조정의 ‘구’자만 들어도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고, 상사 눈치 살피며, 부하 직원에게조차 밉보여 나쁜 평가 받을까 저어해 이 눈치 저 눈치 살펴야 한다.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두주불사(斗酒不辭)하며, 이런 저런 일로 휴일도 반납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의 무게를 견디느라 어깨는 늘 처져 있고, 매일 밤늦은 귀가로 눈가에 피곤을 매달고 살아 항상 어두운 그늘이 자리하고 있다. 바깥에서 구겨진 자존심, 집에서라도 짐짓 큰소리 내며 세울 수 있다면 다행일 텐데, 그 마저도 녹록하지 않다.언제부턴가 아버지는 권위와 품격을 갖춘 가장이라는 존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결국 가장이라는 말 자체가 귀에 생소할 정도가 돼버렸다. 가족을 모두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서도 재정지원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며, 의기소침해 있으나 언감생심 가족의 따뜻한 격려 대신 외로움에 대항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기러기아빠들이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아이들이 비교를 당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엄마 친구의 아들, ‘엄친아’만 있는 게 아니다. 내 친구의 남편, 또는 내 친구 아버지, 즉 ‘내친남’도 있고, ‘내친아’도 있어 수시로 능력을 비교 당할 때면 힘없는 가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능력 없는 못난 자신을 탓하면서.친구 남편보다, 친구 아버지보다 못해도 그는 가정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돼있고, 그동안 그렇게 눈물을 삼키며 살아왔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들어도 내가 짊어져야 할 의무라 여기며 살아왔기에 생색조차 내지 않았다. 냉장고보다 못해 보여도 그가 바로 우리 아버지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