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애, 계교로 강유를 쫓다.②

강유가 등애를 두고 비겁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싸우기를 주장했으나 등애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나오지 아니했다. 강유는 군사를 시켜 약을 올리고 욕설을 더 많이 퍼 부었다. 그러나 등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강유의 군사가 물러가려고 할 때 산위에서 북소리 고함소리가 진동하였다. 강유는 군사를 돌려 싸우려했다. 그런데 위병은 요란하기만 할 뿐 나타나지 않았다. 강유는 약이 바짝 올라 산위로 말을 달려 오르려하자, 포가 터지고 돌과 통나무가 마구 쏟아져서 오를 수 없었다.

그날 밤 3경까지 강유가 싸움을 돋우다가 돌아가려 하자 산위에서 또 다시 북소리 고각소리가 진동했다. 강유는 이제는 싸우기를 그만 두고 산 아래로 군사를 옮겨 둔병하려 했다. 촉병이 서둘러 나무와 돌을 운반하여 영채를 세우려 할 때, 산 위에서 다시 북소리 고각소리가 일어나며 위병이 쏟아져 내려왔다. 강유와 하후패가 촉병을 수습하여 대항하나 어찌할 방도가 없다. 촉병은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넘어지고 쓰러지며 간신히 옛 진으로 돌아갔다.
지난 밤 크게 당한 강유는 군사를 부려 양초와 병장기를 무성산으로 운반하여 영채를 세우고 장기간 둔병할 계획을 차렸다.

이날 밤 3경 등애는 5백 군사를 거느리고 군사에게 횃불을 들게 하여 두 길로 내려와 촉채를 불 질러 버렸다. 병장기가 타고 수레도 타고 모든 집기가 다 불타버렸다. 촉병은 밤 새워 혼전을 하느라고 꼬박 날을 밝혔다. 강유는 영채가 없어지자 군사를 안전지대로 옮기고 하후패와 상의하기를
“남안을 얻지 못하니 먼저 상규를 취합시다. 상규는 남안의 군량기지이니 우리가 상규를 취하고 보면 남안은 저들이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강유는 그렇게 의논하고 하후패를 무성산에서 위병을 대항하라 하고, 자신은 정병을 몽땅 거느리고 상규를 취하려 나갔다. 밤을 새워 진군하다 보니 날이 밝았다. 주변 산세를 살펴보니 험하고 높고 고약한 산길이다. 강유는 향도관을 불러 지명을 묻자 단곡이라 하였다. 이에 강유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지명이 좋지 못하군! 단곡(段谷)은 단곡(斷谷)과 같은 음이다. 만약 위병이 골짜기를 끊는다면 우리는 어디로 간단 말이냐?”
강유가 주저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갑자기 전군에서 알려오기를

“산 뒤편에 티끌이 자욱이 일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납니다. 기필코 복병이 있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빨리 퇴군하라! 이 골짜기를 벗어나야 한다.”
강유가 다급하게 말하자마자 위장 사찬과 등충이 양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시살해 나왔다. 강유는 싸우고 달아나기를 반복하였다. 그런데 앞에서 고함소리가 산천을 뒤흔들며 등애가 나타났다. 귀신같은 용병술을 지닌 등애다. 등애가 정병을 이끌고 앞면에서 공격하자 촉병은 이제 3면 협공을 받게 되었다. 강유는 어찌할 궁리를 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대패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후패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위병을 시살하니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다. 하후패는 강유를 구해내고 앞으로 작전을 상의하니 강유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 실패를 만회하는 길은 기산으로 다시 가는 것이오.”
“기산은 전과 다릅니다. 진태가 이미 점령했고 촉병은 패하여 한중으로 모두 물러갔습니다.”
“아아! 동정을 얻으려던 내 꿈이 산산조각이 났구나!”

강유가 탄식하고 급히 군사를 골짜기에서 빼내려 할 때 등애가 뒤에서 쫓아왔다. 강유는 군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후진이 되어 등애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싸움은 강유의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던 촉병이 산속에서 도깨비 같이 나타난 1지군을 만나 싸워야 했다. 전면의 촉병을 시살해 온 것은 기산을 점령한 진태의 군사였다. 강유군은 전후면의 협공을 받고 좌충우돌하며 헤어나지 못했다. 강유가 헤치고 나아갈 길이 첩첩산중이 되었다. 촉병이 활로를 열지 못하고 시달림을 당할 때 탕구장군 장의가 수백 기를 거느리고 돕고자 왔다. 장의는 첩첩히 쳐진 위병의 포위망 속으로 말을 몰아 뛰어 들었다. 그러나 마음만 앞설 뿐 맘과 같지 않았다. 위병이 화살과 쇠뇌를 워낙 심하게 퍼부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장의는 위병이 어지럽게 쏘아대는 화살을 맞고 장렬하게 죽었다. 하지만 그 덕에 강유는 혈로를 내고 목숨을 구해 한중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강유는 장의의 충용스런 죽음에 감동되어 표를 올려 벼슬을 증직시켜 주고 그의 자손들을 등용해 썼다.

이번 싸움은 장의가 예언한 대로 강유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수많은 장병이 죽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강유는 이런 원성을 막고자 고육지책을 내어 놓았다. 제갈무후가 가정싸움에서 실패하고 인책한 예에 따라 표를 올려 스스로 벼슬을 깎아서 후장군이 되고 대장군의 직무를 수행했다.
한편 등애는 촉병을 물리치고 진태와 함께 승전 잔치를 베풀어 서로를 하례하고 3군을 호궤했다. 진태는 표를 올려 등애의 공을 칭송했다. 사마소는 칙사를 보내어 등애의 관작을 높여주고 아들 등충은 정후로 봉했다.

위왕 조모는 연호를 정원 3년을 감로 원년으로 바꾸었다. 사마소는 천하병권을 잡고 대도독이 되자 정사를 천자에게 신주치 아니하고 제멋대로 결재했다. 출입할 때는 3천 명의 철갑병으로 호위케 하였다. 그리고 엉뚱한 배짱을 가지고 찬탈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를 돕는 심복은 승상부의 장사 가충으로 자를 공려라 하고 하동 양릉 사람이다. 가충은 건위장군 가규의 아들이다. 가규는 조비와 조창의 갈등을 무마시킨 문신으로 사마의와 조휴를 도와 많은 공을 세운바 있었다.

어느 한적한 날 가충이 기막힌 계책하나를 들고 사마소를 찾아와 아뢰기를
“지금 주군께서 천하대권을 장악하자 민심이 소요하고 있습니다. 슬그머니 지방을 돌며 장군들을 만나 우군이 되게 하여 큰일을 도모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가충의 계책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계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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