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성도성이 무너졌구나!①

등애는 마천령을 넘자마자 전쟁을 하는 것인지 놀음을 하는 것인지, 너무나도 쉽게 기반을 잡아갔다. 마막에 의하여 얻은 강유성이 큰 기반이 되었다. 여기서 더욱 용기를 내어 음평 소로를 접수하고 영을 내리기를
“모든 군사들은 강유성으로 모여라! 이제 전열을 정비하여 부성을 공격하라!”
이에 부장 전속이 아뢰기를
“아군이 매우 험준한 영을 넘어와 매우 피곤합니다. 며칠만 쉬었다가 행군하면 좋겠습니다.”

“전부장은 입을 다물라. 병귀신속이라 하는 법이다. 내가 어찌 군심을 어지럽히느냐?”
등애는 노발대발하며 전속의 목을 베라 명했다. 그러자 좌우 제장들이 간하므로 겨우 목숨을 보전케 했다. 전속을 급조한 옥에 가두고 군사를 휘동하여 부성으로 쳐들어가자, 성민과 군사가 놀라워하며 위병이 아니라고 의심했다. 그들은 등애의 군사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병으로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곳으로 예기치 못한 때에 군사가 나타났으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부성의 군사가 등애의 천병에게 싸워보지도 아니하고 모두 항복해 버렸다. 부성이 등애에게 떨어진 소식은 곧장 성도로 전해졌다. 후주는 이제야 놀란 나머지 황호를 불러 묻기를

“어찌하면 좋으냐? 위병이 쳐들어 왔단다.”
“속지 마십시오. 위병이 쳐들어 올 리 만무합니다. 신은 결코 폐하를 저버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후주는 급히 무당을 불러 물으라 했다. 그러나 찾아보니 요망한 무녀는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이제 서촉 천지가 불붙는 듯 발칵 뒤집혔다. 산지사방에서 표문이 날아들었다. 변란을 알리는 첩보가 성도로 날아들었다. 후주는 급히 조회를 열고 문무백관을 모아 대책을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답을 준비한 이가 없었다. 모두 물끄러미 서로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꼬락서니를 바라보다가 극정이 참지 못하고 나서며 아뢰기를

“일이 아주 급하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갈첨을 부르시어 대책을 물어 보시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그래, 부마도위 제갈첨을 왜 내가 생각지 못했지.”
후주는 나라가 위기 상황에 처하자 부마도위 제갈첨을 생각한 것이다. 부마도위 제갈첨은 후주의 딸과 혼인한 후주의 서랑이다. 제갈첨은 제갈공명 즉 제갈무후의 아들로 자를 사원이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어복포에서 곤경에 빠진 동오의 도독 육손을 구해 준 황승언의 딸이다. 황승언은 잠시 어복포에서 나타났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당시로는 아주 뛰어난 제야 선비였다. 그의 사적을 깊이 따져보면 사마휘나 석광원이나 마찬가지로 남양 땅에서 일세를 풍미하며 자기 재주를 즐기면서 살다간 재야학사였다. 황승언의 딸, 제갈공명의 아내는 얼굴은 반반하지 못하고 추녀에 가까웠으나 아주 뛰어나게 기이한 재주를 가졌다. 그러니까 제갈 삼국지에서 나타난 공명의 어머니가 현숙한 미인이고 기이한 재주가 있는 여인이었듯이, 제갈공명의 아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여인영걸이었다. 그녀는 상통천문하고 하달지리하고 중찰인사를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공명과 같은 미장부가 황부인에게 매달려 스캔들 한번 없었던 것을 보면 중찰대인한 여인이 아니었을까 추이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찰대인이나 중찰인사란 말은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어 처세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녀는 처녀시절부터 육도삼략과 둔갑제서를 다 섭렵하고 좌견천리(座見千里) 했었다.

제갈공명이 남양초당에서 공부할 때 황처녀가 어질고 총명하며 슬기롭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공명은 그 소문을 듣고 황승언에게 사위되기를 청하니 황승언이 말하기를
“그래, 그대가 내 딸아이와 맺어지면 한 평생 처로 인하여 근심 걱정은 없을 거야.”
결국 두 남녀가 맺어져서 서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났다. 그것을 네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공명은 학문이 일취월장하였고 둘째 황부인은 추녀지만 당대의 미장부 공명을 남편으로 맞아 꼭 쥐고 살 수 있었고 셋째 제갈첨과 같은 영특한 아들을 둘 수 있었으며 네째 황부인의 영특함과 자상함으로 공명에게 완벽한 뒷바라지를 했으니 예를 들면 전서구의 비법을 시어머니로부터 직접 전수 받지는 않았으나 이어가게 했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흘러 공명이 세상을 뜨니 마천령 아래 동네 음평 소로에 비석을 세워, 남편이 죽은 후에도 더욱 빛나게 하는 일 등, 그녀의 일들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었으나 오로지 공명의 이름을 드날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아무튼 황부인은 공명이 세상을 뜨고 몇 가지 긴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뽕나무 8백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쓰지 않는다. 황부인은 임종할 때 아들 제갈첨을 불러 유언하기를
“너는 충과 효를 근본삼아 한 평생을 검박하게 살도록 하라!”

이 말은 제갈첨의 일생의 삶에 지표가 되었다. 그래서 제갈첨은 복잡한 정치문제에서 한발 물러서서 초연하게 살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해서 어렵지 아니하게 후주의 눈에 들어 부마도위가 된 것이다. 제갈첨은 부친 공명의 사후에 무향후를 습작했고 경요 4년에는 행궁 호위장군이 되기도 했다. 허지만 황호가 권세를 농락하자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아니했다. 그런데 후주는 극정이 이 난국을 타개할 재목으로 제갈첨을 지목하자 정신이 번쩍 들어 제갈첨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첨이 나오지 아니하자 후주가 찾아가 울면서 호소하기를

“위국 등애의 군사가 이미 부성에 둔병하니 성도가 위태롭소. 경은 선군의 옛일을 생각하여 짐을 구해 주시오.”
제갈첨이 울면서 후주에게 아뢰기를
“신의 부자가 선제의 후하신 은혜와 폐하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 일을 어찌 잊겠습니까? 간과 뇌를 땅에 바른다 해도 능히 갚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성도의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시어 신에게 주신다면 한 번 적과 대결하여 사력을 다해 싸워보겠습니다.”
후주는 곧 성도의 장병 7만을 긁어모아 제갈첨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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