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오가 망하는 소리여!③

오왕 손호가 보낸 사자가 돌아가고 육항은 오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폐하, 지금은 진을 공격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진을 경솔하게 공격하면 크게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하오니 국경의 일은 장수에게 맡기시고 임금께서 덕을 닦고 주색을 멀리하여, 나라 안의 민심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토목공사가 크게 벌어지고 천 여 명이 넘는 궁녀가 호화판을 벌이고 있으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 전쟁을 한다면 백성들을 또 한 번 더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왕 손호는 상소문을 읽더니 북북 찢어 버리고 크게 노하여
“짐이 들은 바 육항이 변경에서 적과 내통한다 하더니 진실이구나! 당장 육항의 병권을 회수하라!”
손호는 곧 사자를 보내 육항의 병권을 회수하고 사마벼슬을 주고 좌장군 손기로 육항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은 폭군이 어떻게 날뛸지 모르므로 간하는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왕 손호는 정사를 기분으로 하는지라 연호를 건형이라 고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봉황 원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싸움을 일삼았다. 전쟁이 수년 간 그치지 아니하니 병사들의 고통이 자심했다. 민심은 땅에 떨어지고 폭군 손호를 향한 증오는 나날이 커져갔다. 학정에 시달린 백성을 보고 참지 못해 승상 만욱과 유평장군 그리고 대사농 누현이 손호의 폭정을 간하였다. 그 결과는 손호가 변한 것이 아니라 혹독한 징벌이 날아왔다. 참형을 시킨 것이다. 손호가 즉위하고 10여 년간 세 충신 말고도 30여 명의 충신을 무도하게 죽였다.

손호는 출입할 때면 철기 5만으로 시위하고 나다녔다. 문무백관이 모두 두려워서 간하지 못했다.
한편 양호는 육항이 벼슬에서 물러간 것을 알고 진왕 사마염에게 상소하기를
‘대저 운수란 하늘이 주는 것이라 하지만, 공업은 반드시 사람을 얻어서 이룩하는 것으로 압니다. 지금 강회가 험한 것이 검각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오왕 손호의 광폭한 행동거지는 안락공 보다 더해서, 오국민의 곤핍함이 파촉 보다 훨씬 더합니다. 이때에 대진의 강력한 병력으로 사해를 평정하기를 바라와 아뢰나이다.’

사마염은 상소문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양호에게 청하기를
“경은 나라를 평안케 할 대책이 있을 것이다. 과인에게 기탄없이 가르쳐 달라.”
“지금 오국은 손호의 포악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싸우지 아니하고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손호가 불행한 일을 당하여 죽고 어진 임금이 뒤를 잇게 된다면, 오국을 도모하기가 용이치 아니할 것입니다. 손호가 폭정으로 광기를 부려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는 지금이 오국을 도모할 적기입니다.”
“허면 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한다면 어떻겠는가?”

“신은 나이 늙어 병이 많아 군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따로 지용이 겸비한 장수를 택하시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양호는 사마염에게 하직하고 낙향했다. 이에 가충, 순욱, 빙순 세 사람이 간하기를
“아직 오국을 도모할 때가 아닙니다.”
“경들 셋이서 만류하니 그만 두는 것이 옳도다.”
사마염은 오를 칠 계획을 중단하자 낙향하여 이 일을 알게 된 양호가 탄식하기를

“천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십중팔구인데, 이제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함녕 4년 양호는 낙양으로 가서 벼슬을 내어 놓고 고향에 돌아가 정양하겠다고 했다. 같은 해 12월 양호의 병이 깊어져 위독하자 사마염이 양호의 집을 문병했다. 사마염이 병상에 가자 양호가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만 번을 죽었다 살아난다 해도 폐하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입니다.”
“짐도 오국을 정벌하자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소. 오늘날 누가 경의 뜻을 계승할지 모르겠소.”

“폐하, 신은 이제 죽는 몸입니다. 감히 어리석은 생각으로 우장군 두예가 대임을 맡을 만합니다. 그를 한 번 써 보십시오. 하오나 소신이 두예를 천거했다는 말을 극비에 붙이고 임명하소서.”
“짐이 알기로 착한 사람과 어진 이를 천거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인데, 경은 어찌 그런 중대한 일을 엄히 비밀에 붙이라 하는 거요?”
“신이 알기로 벼슬은 국가에서 주는 것인데, 사사로이 사문을 찾아서 사은하는 일이 많사옵니다. 신의 취하는 바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고 양호는 숨을 거두었다. 사마염은 목 놓아 크게 울고 환궁했다. 곧 양호에게 태부 거평후를 증직했다. 남주 백성들은 양호가 죽었다는 부음을 듣고 철시하여 울었다. 강남의 변방을 지키는 장병들도 양호의 부음을 듣고 모두 울며 슬퍼했다. 양양 사람들은 양호가 평시에 놀던 현산에 사당을 짓고 비를 세워 사철 제사를 지냈다. 오고가든 사람들이 비문을 읽어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이 비를 타루비(墮淚碑)라 불렀다. 후일 시인이 시를 지어 탄식했다.

‘새벽에 올라가 감동했네. 진나라 신하의 사적/ 옛 비석 영락한데 현산엔 봄이로구나!/ 소나무 사이에 뚝뚝 떨어지는 이슬방울/ 마치 당년에 눈물 흘리던 그 사람 같구나./’
진왕 사마염은 양호의 유언을 존중하여 두예로 진남대장군을 삼고 형주를 도독케 했다. 두예의 사람 됨됨이가 노성하고 연달한데다 학문을 좋아하고 부지런했다. 항상 좌구명의 춘추를 좋아하여 앉으나 눕거나 늘 좌전을 곁에 두고 읽었다. 출입할 때도 반드시 좌전을 말에 싣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예를 <좌전벽>이 있는 사람이라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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