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가야산(伽倻山; 1430m)은 경치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전란을 피해서 은거할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유명한 산인데, 그 중턱에 천년고찰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가야란 우리말 가람(江), 개(浦口)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석가모니가 수행한 인도의 붓다가야에 있는 가야산에서 빌려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해인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36대 혜공왕 2년(766) 의상 대사의 제자 순응(順應)과 이정 스님이 당에 유학을 갔다가 우두산(牛頭山; 가야산 옛 지명) 서쪽 기슭에 절을 세우라는 부처의 계시를 받고 귀국해 현재의 해인사 자리에 암자를 지은 것이 시초라고 하지만, 후삼국 시대에 주지 희랑(希郞) 스님이 왕건을 도운 공적으로 고려 태조가 삼국을 재통일한 후 희랑을 승통(僧統), 해인사를 국찰(國刹)로 삼은 이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절집 대부분이 불에 탄 이후, 조선 숙종~고종 때까지 200여 년 동안 7차례나 큰불이 나서 대적광전 등 대부분의 절집은 1817년 이후에 지어졌다. 특히 6·25때 빨치산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벌이자 유엔군은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으나, 당시 편대장인 김영환 대령이 폭격명령을 거부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존되게 됐다. 성보박물관 뒤 계곡을 건넌 오른쪽 공터에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있고, 2002년 이후 매년 장군의 추모제를 열고 있다.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는 외적을 물리치려는 염원에서 고종 23년(1236)부터 1251년까지 15년 동안 피난수도 강화도 선원사에서 고려대장경판을 제작했는데, 조선 태조 7년(1397) 팔만대장경은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인 1398년 다시 해인사로 옮겼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佛), 법(法), 승(僧)을 3보(三寶)라고 하는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 때문에 순천 송광사(僧寶寺刹), 양산 통도사(佛寶寺刹)와 함께 법보사찰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대구에서 88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해인사 나들목이나 김천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성주 나들목을 빠져나가면 해인사로 갈 수 있다. 합천읍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행 군내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하루에 3회만 왕복하고 있어서 대부분은 대구에서 해인사행 시외버스를 탄다.

그런데, 가야산 일대가 해인사 소유여서 그런지 가야산 입구 ‘법보종찰가야산해인사(法寶宗刹伽倻山海印寺)’란 편액이 붙어있는 곳에 입장객과 차량의 통행료를 받는 매표소가 있다. 버스가 진입하면 매표원이 승차해서 일일이 승객수를 계산하고 입장료를 받는데, 일반인은 어른 3000원, 주차비 4000원씩이다. 카드도 안 되고, 오로지 현금만 받는다. 매표소를 지나면 아무 곳에나 편리하게 주차할 수 있는데도, 주차비를 받는 처사는 도무지 부처님의 자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매표소 건물 안쪽에 붙은 홍류문(紅流門)이란 편액은 봄이면 진달래, 가을에는 곱게 물든 단풍이 계곡을 붉게 물들인다고 해서 붙여진 홍류동 계곡을 의미한다.

매표소에서 200여m쯤 올라가다가 오른쪽 완만한 비탈길에 음식점과 기념품을 파는 2층 기와건물을 지나면 성보박물관이다. 사실 천년고찰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치곤 조금 지저분하고 궁색스럽다. 그런데, 해인사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은 불교조각실에 앉은 채 입적한 듯 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목조 희랑 조사상과 팔만대장경을 소재로 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볼만하지만, 입장료라며 500원씩을 받는 것은 자비를 보여주는 사찰이 아니라 철저한 장사꾼 같다.

성보박물관을 지나면 둘레길 ‘가야산 소리길’이 시작되는데, 계곡을 지나 오른쪽 공터에 김영환 장군 공덕비가 있고, 그 위는 스님들의 부도와 탑비가 있는 부도군 이른바 비림(碑林)이다. 그런데, 가장 높은 넓은 공터 한 가운데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원형 부도가 1993년에 입적한 성철 스님의 사리탑이다. 천년고찰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이 역대 어느 스님보다 우월하다는 것인지, 부도의 위치며 넓은 면적에 세운 커다란 조형물은 평생을 넝마 같은 가사 두벌로 살았던 스님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아니었을 텐데도, 후학들이 스님을 욕되게 하는 것 같다.

해인사사적비

일주문으로 가는 길가에는 고려 숙종 원년(1104) 승통이 되고, 예종 때에는 왕사였던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 보물 제128호)가 있는데, 원래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던 비를 1968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속명이 신(申)씨인 악진 스님은 대각국사 의천과 함께 송에 유학했다가 귀국 후 귀법사에 머물다가 입적했는데, ‘원경(元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거북 받침돌과 몸돌 위에 아주 얇은 비석은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과 조각기법 등이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 옆에 해인사사적비도 있다.

신라 36대 혜공왕 때 순응과 이정 스님이 당에서 귀국해 현재의 해인사 자리에 암자를 지을 때, 애장왕의 왕비가 등창으로 큰 고생을 하자 순응은 왕비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오색실을 주면서 실의 한쪽 끝을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쪽 끝을 왕비의 아픈 곳에 대면 나을 것이라 알려주었다. 그대로 시행했더니 배나무는 말라죽고 왕비가 낫자, 임금은 이를 고맙게 여기고 애장왕 3년(802년) 순응이 해인사 짓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사적비 반대편에는 고운 최치원이 수도할 때 꽂아놓았던 것이 자랐다고 하는 전나무가 있는데, 조선중기 서문 밖의 어린이들이 이유 없이 많이 죽자 풍수지리설을 따라서 심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또, 대중가수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노래비도 있다.

성철스님부도

일주문 앞 광장에서 직진하면 가야산 산행길이고. 그 왼편에 카페 다래헌이 있다. 일주문에서 해탈문은 가파른 산길에 일직선으로 배치된 구조인데, 길 양쪽에는 경전 경구를 적은 울긋불긋한 천조각이 빠끔히 널려있고, 놀이동산처럼 커다란 인형을 세워둔 것도 마치 중국 3류영화 소림사 세트장 같다. 법보사찰의 근엄함 보다는 천박스런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매표소의 ‘법조종찰가야산해인사’라는 한자 편액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써놓고, 성보박물관을 비롯해서 일주문의 가야산해인사, 봉황문이자 해인총림이란 편액은 모두 우측에서 좌로 써서 한자를 아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 같다. 사적비며 대부분의 안내판은 글자가 희미해서 읽어 볼 수 없는데, 이런 곳에 관심을 더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해인사소리길

해인총림에서 해탈문까지는 33계단인데, 다소 가파르다. 해인사는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본전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과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국보 제52호)’이 제일이다. 그런데도, 대적광전 바로 뒤 가파른 돌계단 위에 8만대장경이 있는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대장경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대장경판을 보존하기에 알맞도록 창을 아래는 넓고 위는 좁게 만들어서 통풍을 돕고, 또 바닥에는 숯과 횟가루, 소금, 모래를 차례로 넣음으로서 습도를 조절하도록 지었다고 하지만, 팔만대장경을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린다는 것은 여간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해인사 매표소 전경

해인사의 각 전각마다 가파른 돌계단이 방문객을 매우 힘들게 하는데, 구광루에서 대적광전으로 가는 오른쪽에 비스듬한 나무계단에 마대를 덮씌운 통로가 유일한 자비심 같다. 왜 이 통로를 지나는 데는 통행료를 받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무아비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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