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戱題(희제) -
水面天心一段淸(수면천심일단청)한데,
光風霽月箇中明(광풍제월개중명)을.
吾家自有平平地(오가자유평평지)어늘,
何事崎嶇向險傾(하사기구향험경)고.
- 희롱 삼아 짓다 -
수면(水面)과 하늘이 한 모습으로 맑은데,
비 개인 뒤의 바람과 달이 그 속에 밝구나.
내 속에 이미 태평세계가 있거늘,
무엇 때문에 힘겹게 험준한 세계를 향하려 하는고.

◆지은이 이유태(李惟泰): 1607(선조40)~1684(숙종10) 년 간의 학자.
이 시는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서술함으로써 심성(心性)의 이상적 상태를 읊어낸 도학적(道學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지은이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써, 성리(性理)와 예학(禮學)에 밝았다. 벼슬길에 나가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 수양을 더욱 중시하는 은자적(隱者的) 학자였다. 이 시에는 그의 이러한 인생관과 삶의 발자취가 너무나 잘 담겨져 있다 할 것이다.

제1, 2구의 ‘맑은 물위’를 뜻하는 수면(水面), ‘하늘 가운데’를 말하는 ‘천심(天心)’, 그리고 ‘맑은 바람과 달’을 뜻하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송(宋)나라 도학자(道學者)들이 ‘도의 세계’, 또는 ‘깨침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한 단어들이다. 지은이 또한 이러한 단어들을 시어로 선택하여 사용했지만, 그 단어들이 조금도 해묵었다는 느낌 없이 오히려 신선감과 생동감을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다.

아래는 맑은 물, 위에는 새파란 하늘. 천지상하(天地上下)가 모두 순결한데, 그 천지상하 사이로 광풍제월이 등장하니, 위도 아래도 가운데도 모두가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이곳이 바로 광명세계(光明世界)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부분은 자연의 경관을 읊은 것 같지만, 실상은 바로 지은이의 내면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천지상하가 빛으로 화하고, 그 빛과 지은이의 마음이 일체화가 됨을 느낀 것이다. 그러기에, 지은이는 제3, 4구에서 분명히 말했다. “내 속에 이미 태평세계가 있거늘(吾家自有平平地)/ 무엇 때문에 힘겹게 험준한 세계를 향하려 하는고(何事崎嶇向險傾).”라고. 가장 귀한 것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것. 이미 마음의 본 모습을 봤으니, 무얼 더 바라랴.
이 시는 경(景)의 세계를 빌어 내면의 세계를 드러낸 시로, 염락(濂洛)의 도학적 시풍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실천없는 학문은 통발 속 물고기

- 敬次晦庵夫子生字韻(경차회암부자생자운) -
先聖分明喩後生(선성분명유후생)한데,
箇中心象說難輕(개중심상설난경)을.
筌蹄未必離魚兎(전제미필리어토)니,
會必眞知也力行(회필진지야력행)을.

- 공경히 주자(朱子)의 ‘생(生)’자 시운을 빌려 짓다 -
옛 성인(聖人)이 밝게 후인을 깨우쳤는데,
그 중 마음에 대한 학설은 가벼이 여기기 어렵네.
통발?올무엔 물고기?토끼만 걸리는 게 아니니,
반드시 참으로 알고, 또 힘써 행해야 하리라.

◆지은이 윤선거(尹宣擧): 1610(광해군2)~1669(현종10) 년 간의 학자.
이 시는 참다운 학문의 길에 대해 장자(莊子)의 말을 차용하여, 아주 간절한 심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은이는 젊어서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했는데, 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만나 가정과 나라가 쓰라린 변을 당하는 것을 목도했다. 이에 벼슬을 포기하고 금산(錦山)에 은둔하여 김집(金集)을 사사하여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유가(儒家)의 성리학에서는 마음을 일신(一身)의 주인공으로 여기며, 마음이 각성되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속의 본성을 함양하는 것을 수양론(修養論)의 골격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수양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음과 성정(性情)의 관계와 그 기능들에 대해 치밀히 연구하여 심성론(心性論)을 정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들을 어렵사리 알았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만 참다운 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실천이 없다면, 이는 책과 생각에 걸려버린 나약한 지식분자에 불과한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점을 간절히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자의 말을 빌려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장자는 “물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잊어야 하고(得魚而忘筌), 토끼를 잡았으면 올가미는 잊어야한다(得兎而忘蹄).”고 했다. 즉 알맹이를 얻었으면, 도구에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됨을 뜻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여기서 이 말의 본뜻과는 조금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즉 지은이는 알맹이를 얻었으면 도구를 버려야함보다는, 도구 속에 걸리지 말 것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3구에 “통발·올무엔 물고기·토끼만 걸리는 게 아니니(筌蹄未必離魚兎)"라 하여, 학자가 실천을 등한시하고 이론에만 빠져있다면, 이 역시 통발과 올무에 갇힌 물고기나 토끼 꼴과 다름이 없는 학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시에는 참 학자의 길을 일깨워주는 정성이 진하게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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