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조계산(884m)의 동쪽에는 한국불교의 쌍벽을 이루는 교종의 거찰 송광사(松廣寺: 사적 제506호)가, 서쪽 기슭에는 선종의 총본산인 선암사(仙巖寺: 사적 제507호)가 있다. 두 사찰은 산길로 약6㎞쯤 떨어져 있어서 조계산을 올라가면 모두 볼 수 있다(2015. 3.11. 순천 송광사 참조).

선암사 사적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 7년(549) 아도(阿道) 화상이 현재의 비로암(毘盧庵) 터에 해천사(海川寺)를 창건한 것이 시초이고, 그 후 신라 말 경문왕 원년(861년) 풍수지리를 처음 전파한 스님으로 알려진 전라도 영암출신인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 827~ 898)이 중창했다고 한다. 도선 국사는 조계산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는 바위(仙巖)’가 있다며 비로암을 선암사로 고쳤지만, 선암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4대 광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중국에서 천태교를 전수받아 1092년 선암사에서 천태종을 개창한 이후부터다.

승선교와 강선루
강선루
그러나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 선암사도 불에 타서 폐사가 된 채 100여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 호암 약휴(護岩 若休; 1664~1738)대사가 중건했다. 영조 35년(1759년) 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계특 대사는 빈번한 화재의 원인이 조계산의 산세 때문이라며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고, 절 이름도 해천사(海泉寺)로 바꿨다. 하지만, 순조 23년(1823년) 또다시 불이 나자 해붕(海鵬)·눌암(訥庵) 스님이 중창불사를 할 때, 산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되돌렸다고 한다. 그 흔적이 일주문에 남아 있는데, 들어갈 때 보이는 현판은 ‘조계산 선암사’이지만, 나갈 때 보이는 현판에는 ‘청량산 해천사’라고 새겨있는 것이다.

호남고속도로 승주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간 뒤 857번 지방도로를 약6㎞쯤 달려가면 선암사주차장인데, 주차비는 2천원이다. 순천역이나 순천고속버스터미널에서 30분마다 출발하는 선암사행 1번(일반버스), 100번(좌석버스)버스를 타고 약40여분 가면 선암사인데, 일반버스가 800원, 좌석버스는 1500원이다. 선암사 입장료는 어른 2천원, 어린이 1천 원씩이다.

주차장에서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까지 약1㎞가량 숲길을 걷는 것은 멋진 추억인데, 이른 봄이면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진입로에 개나리며 진달래 등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철에는 삼림욕을 할 수 있다. 또, 경내에는 매화와 동백이 많아서 이른 봄이면 꽃구경을 하려고 선암사를 찾는 사람들도 많다.

선암사 부도
원통전
숲길 오른쪽 산기슭의 수많은 부도와 탑비들이 있는데, 그 중 맨 앞줄 왼편에서 세 번째 부도가 약간 방향을 비틀어져 있는 것은 묘향산에서 입적한 주지 스님을 위하여 묘향산을 향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런 비석은 하동 쌍계사 대웅전 앞의 부도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규격화된 부도 탑을 배치하면서 이런 파격적인 착상이 퍽 인상적이다.

일주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는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선암사를 중창할 때 축조한 아치형 돌다리로서 선암사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선암사에서 2개의 승선교를 만들어서 계곡을 건너고 또다시 건너게 한 것은 현세와 선계를 구분하려는 것이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는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려고 100일 기도를 했으나 실패하자 낙심하여 몸을 던지려는 순간 어디선가 한 여인이 나타나서 대사를 구해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호암대사는 그 여인을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고 관음전을 지어 관음보살을 모셨으며, 자신이 몸을 던지려던 곳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 승선교를 세웠다고 한다. 관음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원통전(圓通殿)을 말한다.

승선교를 건너면 선녀가 하강했다고 하는 강선루(降仙樓)가 있고, 강선루 옆에는 긴 타원형 연못 안에 조그만 인공섬 삼인당(三印塘)이 있다. 삼인당은 도선 국사가 불교의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등 삼법인을 상징하여 만물은 변해서 그대로인 것이 없으며, 이것을 알게 되면 열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예전에는 승선교를 거쳐서 경내로 들어갔지만, 근래에는 그 옆에 길을 내서 왕래하도록 하고 있다. 그 맞은편 담장 아래에는 아담한 통나무 찻집 '선각당'도 있다.

일주문
인공연못 삼인당
선암사 일주문은 수많은 화재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목조건물이다. 또,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 사천왕문을 세우는 일반사찰과 달리 천왕문이 없는데, 이것은 조계산 장군봉이 사천왕처럼 선암사를 지켜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범종루를 지나 대웅전 영역에 진입하면 육조고사(六朝古寺)라 써진 강당과 마주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인 대웅전은 순조 25년(1825)에 중창된 건물로서 기단은 한국식 견칫돌을 자연스럽게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민흘림기둥으로 지었다(보물 제1311호). 대웅전의 창호는 모두 꽃살무늬로 장식되었고, 내부는 층단을 이룬 우물천장으로 장엄하게 단장됐다. 1753년 제작된 국내 최대의 괘불(6.82m× 12.15m)을 비롯하여 영조 41년(1765)에 제작된 영산회상도 등 전각 곳곳에 아름다운 불화가 많다.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팔상전이 있고, 팔상전 뒤편에 따로 떨어진 작은 건물이 태고종 종정이 집무하는 각황전(覺皇殿)이다.

선암사는 자연스런 가람배치가 소박하고 아담하고 지붕과 지붕이 줄지어 이마를 맞댄 모습이 넉넉한 부잣집처럼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주는데, 오래된 절집의 풍치가 살아있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조계종단과의 갈등 때문이라고 한다.

동백꽃 핀 선암사
홍매화핀 풍경
그것은 1954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절에서 물러가라’며 불교계에 정화 지시를 내리면서 비구와 대처간의 분쟁이 격심해졌는데, 정부는 1962년 비구와 대처를 통합한다는 형식으로 조계종단을 새로이 출범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찰에서 대처승이 밀려나면서 불교계는 비구승의 조계종과 대처승의 태고종으로 나눠지고, 1970년 태고 보우국사(太古 普愚: 1301~1382)를 종조로 하는 태고종을 만들어 선암사를 태고종총림으로 삼았다. 태고종 유일의 총림이기도 한 선암사의 소유권은 여전히 조계종단에서 갖고 있는데, 각황전은 여느 시골집 같은 고졸한 모습이 오히려 친근감을 준다.

선암사에는 승선교(보물 제395호), 대웅전 앞의 두 개의 3층 석탑(보물 제395호), 조사당의 대각국사 진영(보물 제1044호), 대각암부도(보물 제1117호), 북부도(보물 제1184호), 동부도(보물 제1185호) 등 보물 이외에도 볼만한 것이 많다.

누운 소나무
무량수각 앞 노송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누운 소나무를 생불(生佛)이라고도 하지만, 또 다른 아름다움은 사시사철 철따라 피고 지는 매화· 동백· 철쭉· 산수유· 영산홍· 수국· 물푸레나무 등 수많은 꽃나무들이다. 특히 각황전과 대웅전 뒤편의 가람들로부터 운수암에 이르는 담장 사이의 홍매화는 ‘선암매(仙巖梅)’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유명한데, 수령 약600년으로 추정되는 매화나무 약50주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천연기념물 제488호).

매화가 만발할 때면 선암사 홍매화를 보러 찾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뤄서 이곳이 사찰인지 수목원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연중 계속하여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어서 고색 찬란한 건물, 아름다운 꽃, 그리고 세속에 찌든 마음의 정화를 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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