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絶命詩(절명시) -
鳥獸哀鳴海嶽嚬(조수애명해악빈)하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을.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을.
- 자결(自決)에 임하여 지은 시 -
새와 짐승은 슬피 울고 바다와 산은 찡그리니,
무궁화 이 나라는 속절없이 망해버렸네.
가을 등불에 책을 덮고 천고의 역사를 회고해보니,
글 배운 선비노릇하기 참으로 어렵구나.

◆지은이 황현(黃玹): 철종6(1855)~1910년 간의 문인(文人).
지은이는 호가 매천(梅泉)으로 시문에 능통했으며, 평소에 투철한 시대의식과 날카로운 비평정신을 가졌었다. 그래서 많은 우국시(憂國詩)를 남기기도 했다. 이 시는 지은이가 일본에게 국권(國權)을 뺏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자결을 하면서 지은 절명시(絶命詩)이다.

지은이는 마지막 구절에서 “글 배운 선비노릇하기 참으로 어렵구나”라 하고, 그 길로 자결을 감행해버렸다. 그의 자결은 왜적의 침략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힘의 한계를 깊게 느꼈고, 그로써 울분과 자괴감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쌀 한 톨의 국녹(國祿)도 받은 적이 없는 초야의 포의(布衣)였던 그는 망국에 임하여 죽음을 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에게서는 나라가 곧 그의 목숨이었던 것이다.

1905년 사실상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사건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 사림(士林)을 주축으로 열띤 항쟁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기우는 국운은 끝내 붙들지 못했다. 마침내 경술국치에 이르자, 지은이 같은 문인들은 지사(志士)로, 또는 자결로 일본에 항거했던 것이다.

이 시는 나라의 멸망에 임하여 슬픈 심정과 자신의 무기력함을 한탄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제1구에는 “새와 짐승은 슬피 울고 바다와 산은 찡그리니”라고 했다. 이처럼 천지만물이 모두다 조선(朝鮮)의 멸망을 슬퍼한다는 것은 망국에 대한 자신의 슬픔이 한없음을 드러내고자 해서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자기로서는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암시함으로서, 시 전체에 비장감(悲壯感)을 한껏 불어넣고 있다.
이 시는 망국에 임하여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름도 모른 채 사랑에 빠지는데…

- 증김태현(贈金台鉉) -
馬上誰家白面郞(마상수가백면랑)고.
邇來三月不知名(이래삼월부지명)을.
如今始識金台鉉(여금시식김태현)이니,
細眼長眉暗入情(세안장미암입정)을.
- 김태현(金泰鉉)에게 주다 -

마상(馬上)엔 어느 집의 낯모를 서생인고.
찾아 온지 석 달이 되었건만 그 이름을 알지 못했네.
이제야 비로소 그가 김태현(金台鉉)임을 알았으니,
가는 눈 긴 눈썹이 은근히 마음에 드네.

◆지은이 선진의(先進) 딸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여인이다.
이 시는 이른 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이다.
남녀간의 정을 읊은 시로는 『시경(詩經)』의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이 유명하다. 「정풍」의 시 중 ‘건상(褰裳)’이란 시를 보자. “그대가 나를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면(子惠思我), 저는 치마를 걷고 진수(溱水)의 강물을 건널 것입니다(褰裳涉溱). 그대가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子不思我), 어찌 남자가 그대 뿐 일까요(豈無他人). 미치광이의 미친 짓입니다(狂童之狂也且).” 사랑의 정열이 강렬하지만, 여차하면 대상을 갈아치워 버릴 정도의 개방적인 이성관을 가졌다 하겠다.

어느 나라든 옛날에는 자유롭게 연애를 했다. 우리나라도 이 시의 지은이가 살던 고려 때는 물론, 조선 초·중기까지도 남녀간의 사귐이 자유로웠다. 단지 조선 중기 이후로 예법을 중시한 성리학(性理學)이 토착화됨으로써 남녀 간의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단지 조화로움은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의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지은이는 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지은이 주위에 훤칠한 선비가 백마를 타고 찾아온 것이다. 수시로 그의 풍채를 눈여겨보면서 가슴속에 연정을 싹 틔었다. 그런데 지은이는 그의 용모만 보았지 아직 말을 나눌 기회는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그 선비의 인적사항은 물론,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설렘을 달래며 지내던 어느 날 비로소 그의 이름을 알았으니, 그 이름은 바로 김태현(金台鉉)이었고, 이 때가 그를 처음본지 석달 째 되는 때였다. 김태현은 1261년~1330년 간에 생존한 고려의 문신이었는데,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스캔들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지은이는 시를 통해 김태현에 대한 연모의 정을 거침없이 드러내었는데, 특히 끝 구절의 “가는 눈 긴 눈썹이 은근히 마음에 드네.”란 구절은 김태현을 사모하는 이유를 솔직하면서 재치 있게 표현해냈다고 하겠다.

이 시는 보기 드문 주제의 시로서, 사랑의 정을 천하지 않으면서 과감히 드러낸 수작(秀作)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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