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옥산(呈玉山) -
秋淸池閣意徘徊(추청지각의배회)한데,
向夜憑欄月獨來(향야빙란월독래)를.
滿水芙蓉三百本(만수부용삼백본)은
送君從此爲誰開(송군종차위수개)오.

- 옥산(玉山)에게 드리다 -
맑은 가을 못 가의 누각에 있노라니 마음이 뒤숭숭한데,
깊어 가는 밤 난간에 기대어 있을 때 달이 홀로 떠오네.
물에 가득 부용화(芙蓉花) 삼백 포기는
그대 보낸 뒤엔 누굴 위해 피울 것인가.

◆지은이 원씨(元氏):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이 시는 님을 보내는 정을 전경을 통해 품위 있게 드러낸 작품이다.
남녀의 사랑은 인간의 역사를 낳고, 또 그 역사를 유지해 가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사랑은 그 어떤 감정보다 자연스럽고, 또 강력한 힘을 가진 감정이다. 사랑은 현대인이나 옛 시대의 사람이나 모두가 소유한 공통의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사랑을 맺기도 어려웠고, 또 사랑의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도 없었다. 만약 사랑의 스캔들을 일으키게 되면, 금새 음천(淫賤)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히게 된다. 그래서 그 시대의 사랑은 은밀했고, 또 목숨을 걸만큼 진지했던 것이다.

지은이는 사랑하는 정인(情人)과의 이별을 앞두고 이 시를 지었다. 아무 일 없어도 슬픔이 솟는 가을인데, 거기에다 달조차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그러니 이별의 슬픔은 너무나 예리했고, 또 쑥스러움 때문에 가지 말라고 매달리며 하소연할 수도 없으니, 이별의 가슴앓이는 더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아쉽고 아픈 심정을 지은이는 눈앞의 부용화(芙蓉花)를 빌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부용화는 실제의 꽃을 말하기도 하지만, 지은이 자신을 상징한다고도 할 것이다. 부용화가 한 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백 포기라 한 것은 지은이의 사랑이 그만큼 열렬하고 또 크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 사랑은 받아줄 님이 가고 나면, 이제 누구를 위해 사랑의 감정을 피울 것인가. 끝 구절에서는 이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보아줄 이 없는 꽃도 무의미하지만, 받아줄 이 없는 사랑 또한 무의미한 것이다.
이 시는 눈앞에 펼쳐진 전경과 이별에 임하는 그 속내를 자연스럽게 조화시켜 읊어낸 수작이라 할 것이다.

 

신선이 살것 같은 신비한 풍경

- 遊仙詞(유선사) -
烟鎖瑤臺鶴未歸(연쇄요대학미귀)한데,
桂花陰裏閉珠扉(계화음리폐주비)를.
溪頭盡日神靈雨(계두진일신령우)하니,
滿地香雲濕不飛(만지향운습불비)를.

- 선계(仙界)에 노니는 노래 -
연기는 요대(瑤臺)를 감싸고 학은 돌아오지 않는데,
계수나무 꽃 그늘 속에 구슬 달린 사립문이 잠겨있네.
시내 머리에 종일토록 신령한 비가 내리니,
땅에 자욱한 향기로운 구름은 젖어서 날지 못하네.

◆지은이 허난설헌(許蘭雪軒):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여류시인.
이 시는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서의 솜씨를 손색없이 보여주는 작품으로, 감상자를 선경(仙境)으로 이끄는 힘을 가졌다 하겠다.
신선(神仙)의 세계가 따로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세파에 찌든 속인(俗人)들은 고달픈 영혼을 달래고자 끝없이 선계(仙界)를 상상해내고, 더 나아가서는 그 세계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또 그것이 안 될 때는 선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선계는 욕심 없는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욕심이 사라지면 번뇌도 사라지리니, 이때 문득 선계에 들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 조상들은 늘 선계를 동경해왔다. 이 점은 지은이도 마찬가지이기에, 우연히 만난 비경(秘境)을 선경으로 묘사한 것이다. 제1구의 ‘요대(瑤臺)’는 신선이 살고 있는 누대(樓臺)를 말한다. 지은이는 신비한 분위기를 가진 산중에서 아름다운 누대를 보았던 것이다. 그 누대에는 응당히 지키고 있어야할 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오직 진한 연기만이 감싸고 있었다. 누대 옆 계수나무 꽃 그늘 속의 초가집에는 이슬방울 맺힌 사립문이 고요히 닫혀있는 것이다. 과연 신선이 살만한 신비한 분위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초가집 위의 시내 머리에는 종일토록 신령스런 안개비가 내리는데, 사방 땅에 자욱히 깔린 구름은 날지 못하고 멈춰 있는 것이다. 구름이 날지 못하는 이유를 지은이는 ‘습불비(濕不飛)’, 즉 ‘젖어서 날지 못하네’라 했다. 번쩍이는 상상력과 기묘한 글 솜씨가 뭉쳐져 이루어진 단단하고 찬란한 보석인 것이다.
이 시에는 매 구절마다 ‘연기’, ‘그늘’, ‘비’, ‘구름’이라는 정적이면서도 유한(幽閑)한 느낌을 주는 자연물이 배치되어 있다. 지은이는 이를 통하여 이 시 속에다 선계의 이미지를 완벽히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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