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사회부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 김춘수의 대표 시 ‘꽃’의 일부다. 누구나 꽃을 안다. 꽃이 상징하는 메타포도 안다. 다만 왜 우리가 장미며 봉선화며 구절초 등을 통칭해 꽃으로 부르는지, 언제부터 꽃이라는 단어가 한글을 쓰는 이들에게 고움과 아리따움을 연상시키는 키워드로 상용화됐는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악어며, 뱀, 상어 따위처럼 포악하거나 흉측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명사들이 있다. 구태여 명칭과 실체를 일치시키지 않아도 오싹해지기 마련인데 악어와 뱀, 상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 부르기로 한 같은 언어 동아리의 사회적 약속에 따라 팔자에도 없던 천형(天刑)을 뒤집어쓴 꼴이니 말이다. 만일 그 언젠가 꽃이라는 사물에 악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우리 뇌리는 악어를 고움과 아리따움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고 반대로 악어라는 동물에 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꽃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포식자로 인식됐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을 언어의 사회화라고 한다. 언어는 그 사회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어느 일부의 언어습관에 의해 합의되지 않는다. 춘장에 갖은 채소와 돼지고기 등을 볶아 삶은 면 위에 얹어 먹는 음식을 모든 국민은 짜장면으로 불렀다. 그러나 표준말은 짜장면을 자장면의 오기로 규정했다. 짜장면이 표준말이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절대다수가 사용한 이름이기 때문에 비록 표준말이 아니더라도 사회화가 된 것이다.

문명이 급속도로 진화하며 숱한 신조어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세대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가 신조어에 대한 이해도일 정도다. 신조어 중 사회화 과정을 거쳐 후손 대대로 통용될 언어들이 있고 특정 계층 간 소통의 도구로 활용되다 구시대의 유물로 폐기처분 될 언어들도 있다. 언어의 생사여탈권은 사회화가 쥐고 있는 셈이다.

요즘 은어(隱語)나 비어(卑語)는 민망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외계어가 난무한다. 주로 청소년들과 청년층의 대화, 특히 SNS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이다. 이를 나무라야 할 언론 특히 방송 예능프로그램들이 되레 나서 외계어를 뿜어내는 볼썽사나운 장면이 지천이다. 고약하다는 탄식이 절로 터지는 뜻도, 의도도 이해 불가 상황이다. 그들만의 소통 도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로서 자괴감을 느껴야 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기특하지는 않다. 그러면서 그들이 중년이 되고 장년이 돼도 세종대왕 격노하실 파괴적인 언어를 구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그 세대의 치기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언어의 사회화는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화가 출산한 언어는 세대가 다르더라도, 이념이 다르더라도, 생각이 다르더라도 같은 언어권의 사람들이라면 쉬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소통 측면에서 본다면 보고 듣기 민망한 철부지들의 외계어만큼이나 불편한 계열의 언어가 또 있다. 못 알아듣는 것인지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인지 외계어보다 더 한심한 ‘정치어(語)’다.

거짓말에 능통한 능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서 빚은 불통 논란이나 ‘선거구 획정’에서 들통 난 밥그릇 싸움이나 국민의 바람을 담은 소통은 무시한 채 불필요한 피로감만 양산하는 꼴이 골수 깊이 박힌 우리 정치의 DNA는 아닌지 의구심마저 든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선거구 획정도 우리글을 깨우친 사람이라면 켯속까지는 몰라도 액면 그대로는 안다. 다만 왜 국정이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다. 정치깨나 한다는 분들이 이미 사회화 과정을 거친 쉬운 언어들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국민들을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외계어 쓰면서도 창피한 줄 모르는 철부지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해독 불가인 것은 외계어나 정치어나 마찬가지다. 되레 뜻은 알겠는데 하는 짓을 이해할 수 없는 정치어가 더 문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의 시제가 꽃이 아니라 정치였다면 차라리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말 것을 그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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