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사회부장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감이라는 프레임이 있다. 똑같은 사물, 똑같은 현상을 마주해도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바가 똑같지 않은 이유다. 사고(思考)가 버무려진 범주는 더욱 딴판이기 마련이다. 한날한시 한 뱃속에서 나와도 행동거지가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DNA는 그 복잡하고 오묘한 구조만큼이나 지문이 모두 다른 것처럼 태생적 특성을 부여한다. 타고난 것에 이러구러 환경적 요인이 덧대지면 관점(觀點)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읽고 해석하게 된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인간관이 되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앵글이 되는 식인데 굳어지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좀처럼 결박을 풀 수 없는 심연 상태가 된다. 어떤 관점이 골수에 박혀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인간사 갈등과 반목의 시원(始原) 중 하나가 관점의 차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제아무리 이타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법이다. 피붙이라도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은 내가 될 수 없어 내 마음 같지 않으니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내 관점만 주입하며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으면 거북한 일이 발생하곤 한다. 천륜인 부모 자식 간이 그렇고, 부부지간이 그러하고 형제자매 간이 그러하며, 천륜 비슷한 친구지간도 그러하다. 순간 뇌가 시킨 대로 움직였을 세 치 혀로부터 서운·섭섭하고, 서럽고, 야박한 감정 따위가 뒤엉킨다.

생리상 비교적 덜 농밀한 사회라는 공간은 관점의 상이가 더욱 예민하게 작용한다. 노사 간이 그렇고, 직장 상하 또는 동료 간이 그러하며 이해관계인 간이 그러하다. 갑을이 존재하는 판인지라 대게는 을이 과포화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경제 활동을 넘어선 사회 구성원 간 시각차도 엄연하다. 이를테면 빈부 격차가 그렇고, 장애와 비장애 간 장막이 그러하며 노인문제와 복지문제 등을 바라보는 견해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정부가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게 장점을 부각시키는 임금피크제가 왜 노동계에는 뜨거운 감자가 됐는가 하는 데서 관점의 차이는 도드라진다. 정치판에서의 관점지차는 사분오열이나 이합집산의 단초가 되기도 해 이미 애정이 결핍된 관객에게 고도의 피로감을 주곤 한다.

배려하고 이해하는 관점이면 답이 보이련만, 기왕이면 가진 자가, 힘 있는 자가 베풂의 관점을 갖는다면 가정이 평화롭고 사회가 안정되련만, 말이 쉬운가 보다.

누군가는 ‘아는 게 병’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벌써 이만큼이나 했다고 자위하고, 누군가는 아직 이것밖에 못했다고 푸념한다. 같은 비행기를 탑승한 누군가는 너무 낡아 불안하다고 핀잔하고, 누군가는 너무 낡았다는 것은 추락한 적이 없다는 의미이니 안심이라고 토닥인다. 뉘앙스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상엔 낙관적인 사람이 있고 비관적인 사람이 있다. 적극적인 사람이 있고 소극적인 사람이 있다. 물론 어느 쪽이 맞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름일 뿐이다. 다만 절망보다는 희망을, 부정보다는 긍정을 바라보는 힘만으로도 일신이 편한 게 인지상정이다. 누구나 로또에 당첨돼 일확천금을 얻지 못한다. 누구도 돌보지 않고 건강을 장담할 수 없다. 누구도 노력하지 않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안간힘을 쓴다고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바람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사에 에멜무지로보다는 어기차게 덤벼보길 갈망한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고 자애심을 키우는 관점을 갖는 데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신년 즈음 나약한 우리가 재미삼아 기대보는 점(占)보다는 세상과 소통하는 관점(觀點)을 관용과 긍정을 윤활유삼아 기름칠하고 조이는 게 이문 남는 장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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