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사회부국장

현재를 살면서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자격지심의 발로이거나 치기다. 평등하지 않고 평등할 수도 없는데 어찌 불평등을 타박하며 호기롭게 평등하기를 바라겠는가. 언필칭(言必稱) ‘요람에서 무덤까지’ 불평등이 고착화된 것이 시방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갓난아이에게 부여된 계급은 10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면서 두터운 갑옷을 두른다. 마치 유산처럼 부와 명예와 권력 따위가 한 동아리 되고 가난과 멸시와 좌절 따위가 한 동아리 돼 대물림되면서 흙수저를 물고 나왔으니 금수저를 물고 나왔으니 한탄조를 토해내며 부모 탓하고 환경 탓하고 사회 탓하는 흡사 사위(四圍)가 절벽으로 가로막힌 청춘들이 부지기수인 이유다. 바닥이 드러난 개천에선 용은커녕 미꾸라지도 나지 않는 법이다.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의 서열이고 곧 학업 성적으로 이어지는 세태는 때 이른 좌절감을 짊어지게 하곤 한다.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격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비교 대상만 있다면 도긴개긴 사이에도 섞이기를 불편해한다. 얼마 전 대전에서 4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엇갈린 두 초등학교의 명암이 논란거리로 대두된 바 있다. 한 곳은 기피대상이고 한 곳은 선호대상인 이유는 부모들의 경제력에 있었다.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언젠가는 중대형 아파트 거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소형인 이웃 아파트와 통하는 쪽문을 봉쇄하기도 했다. 여러 이유를 들었는데 쉬 납득이 되지 않는 모멸의 언어들로 기억된다. 이슈화만 안 됐지 이런 유형의 갈등은 있어 왔다.

방학이면 해외로 연수를 떠나는 학생들이 많은 초등학교와 방학이면 결식을 걱정해야 하는 학생들이 많은 초등학교의 상반된 현실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사교육의 호위를 받는 학생들과 공교육도 버텨내기 힘겨운 학생들의 끝 지점은 다른 밑그림의 ‘청춘’으로 박제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1988년의 청춘과 2016년의 청춘을 비교한 적이 있다. 단언컨대 불평등이 덜 여물었던 1988년의 청춘이 오늘의 청춘보다는 덜 고단했다고 본다.

이러구러 청년을 지나 중년을 지나 장년을 관통하면 노년에 이른다. 선택은 없다. 더구나 100세 시대란다. 가진 것 없이 육신이 노화된 마당에 100세 인생이 축복일까 싶은데 서글픈 지표들이 우려를 부채질한다.

OECD 국가 중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 1위, OECD 국가 중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 1위는 어쩌면 대책 없는 100세 시대 도입부 그 서막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살률과 빈곤율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는다. 전문가들은 노인 자살 충동의 가장 큰 원인으로 경제적 빈곤을 꼽는다. 우리 사회 전반에서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황은 손 쓸 방도 없는 100세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로 투영된다.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자라길 바라고 부모의 하해와 같은 내리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잠시나마 가정의 소중함을 곱씹는 5월의 살가운 가슴팍이 되레 아리게 다가오는 이들이 많다면, 소박한 행복조차 누릴 수 없는 이들이 많다면 5월은 차라리 살풍경이다.

사회적 약자 즉 2등 시민들이 겪는 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문화가 조금씩 움트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몸짓을, 제대로 듣고 반응하는지는 의문이다.

가난이 잉태하고 차별이 살찌운 불평등은 그 어떤 정체(政體)로도 종식시킬 수 없다. 그래도 정치가 나서야 한다. 정치가 아니고서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만들 수 없다. 오는 30일이면 앞 다퉈 민생을 걱정한다고 호언했던 20대 국회가 개원한다. 기대해 봤자 라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벼랑 끝 민심을 읽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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