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이현동 두메마을(1구간)

 

가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다량의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가 남쪽 바다에서 유입된다. 파랗던 하늘은 이내 잿빛으로 물들고 싱그럽던 황금들녘에도 어둠이 드리운다. 아득히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비 냄새를 잔뜩 머금고 대청호반을 스치듯 지나간다. 한바탕 소란스러울 모양이다.

대청호반 한적한 자리, 두메마을에도 일찍 저녁이 찾아왔다.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가마솥을 달구며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장작이 타면서 나는 연기에선 식욕을 당기는 향이 난다. ‘스모크 향’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이 향이 있어야 궁극의 힐링(healing)을 경험하게 된다.

 


 

#. 배나무가 많았던 산골마을

대청호오백리길 1구간의 끝자락 이현동. 대청호수길 포장길을 경계로 배고개(배오개)와 심곡마을이 있다. 배고개는 배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그리고 심곡(深谷)마을은 골짜기가 깊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

한자로 배나무 이(梨), 고개 현(峴)을 써서 이 마을은 이현동이다. 마을 이름만 보면 이곳은 영락없는 산촌(山村)이다. 층층이 계단을 이루는 ‘다랑이 논’이 끝없이 펼쳐진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곳은 더 이상 산골 오지마을이 아니다. 대청댐이 조성되고 심곡마을 어귀까지 물이 차오르면서 이곳은 강촌(江村)이 됐다. 또 지금은 배나무가 아니라 감나무가 많다. 집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감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그래서 이 마을엔 까치와 같은 새들이 참 많다. 땡감이 홍시가 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여 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수몰지역에서 마을 가구 절반가량이 고향을 떠나 지금은 40여 가구만 남았다. 그래도 십수 년 전부터 이 마을을 찾아와 정착한 이들이 속속 늘면서 조금은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이 마을은 두메마을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농촌체험마을이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두메마을이 알려진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오랜 세월 대전에서 교편을 잡고 퇴직한 황부월 이장님을 중심으로 마을 어르신들이 힘을 모아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

농촌체험의 중심은 ‘두메마을 들꽃내’다. 두부와 떡, 효소 만들기 체험은 연중 이뤄지고 봄엔 매실, 초여름엔 감자를 캐고 한여름엔 토마토와 복숭아, 가을엔 고추, 늦가을엔 홍시를 따 음식을 만든다. 특히 콩으로 메주를 띄우는 발효체험과 산야초를 발효시켜 음료수를 만들거나 신선한 산야초로 떡을 만드는 체험이 인기다. 믿고 먹을 수 있는 재료와 고향 할머니의 손맛이 어우러지니 ‘맛’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이장님 댁 ‘들꽃내’에선 민박도 친다. 가족 단위 1박 2일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덕분이다.

한 무리의 체험객이 다녀간 뒤 시끌벅적했던 마을에도 이내 평온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이제 온전히 마을 사람들의 휴식만 남는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통에 마을은 한산하고 고요하다. 가을비는 운치를 더하고 빗소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여행 중에 비가 내리면 구질구질해지기 마련인데 이 마을에선 전혀 그렇지가 않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마음을 맡기니 어느새 ‘정화’의 순간을 맞게 되고 한순간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마음은 평온을 되찾는다. ‘멍 때리기 딱 좋은’ 분위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창밖을 바라본다. 걱정과 근심이 없는 이런 마음의 평온을 느껴본 지가 언제인지….

비 내리는 어두운 밤, 딱히 할 것도 없지만 들꽃내 민박집 들마루에 앉아있으면 해야 할 일도 잊게 된다. 말 그대로 ‘귀차니즘’ 유발자다. 바쁘게 사는 게 미덕이 돼버린 도시생활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래서 더 그리워지는 마음의 평온을 이곳에서 찾는다. 막걸리에 파전이 없어도 비 내리는 두메마을은 힐링의 원천 그 자체다.

 

 

#. 거대억새습지 바람의 기억

두메마을엔 ‘이현동 거대억새습지’가 있다. 마을과 대청호 사이에 존재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마을에서 대청호로 흘러드는 배오개천이 이곳에서 자연정화가 된다.

찬바람이 불면서 습지에선 억새들이 하얀 솜털을 흩날리기 시작했다. 비 갠 아침 청명한 바람에 억새들이 하늘하늘 춤을 춘다. 습지 한 켠 정자에 자리 잡고 앉아 지그시 눈 감고 이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에서 바람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미지에 세계에서 공상의 나래를 펼치며 대청호반의 정취를 마음에 담는다. 따스한 햇살, 시원한 바람을 온전히 느끼면서 ‘느림의 미학’에서 힐링을 찾는 일이다. 천고마비의 계절, 정자에 기대 ‘독서 삼매경’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길 따라 천천히 거닐면서 억새 사이로 출렁이는 대청호 물결을 마음에 담는 것만으로도 힐링에 다가선 느낌이다.

이현동 거대억새습지의 규모는 1만 2116㎡(약 3600평)로 실로 거대하다. 억새와 노랑꽃창포, 삼백초, 수련 등 수생식물 군락이 조성돼 있고 버드나무 군락은 대청호와 접해 있다. 밑동이 잠긴 버드나무 군락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면 가히 환상적이다.

#. 또 하나의 명소 '하늘강 아뜰리에’와 '끌리움'

두메마을엔 ‘도장골’이란 지명도 남아 있다.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이 지명처럼 마을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10여 년 전 도예·화가 부부가 이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하늘강 아뜰리에’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현대식 공방이다. 하늘강 공방은 조윤상·신정숙 작가의 작업실이면서 체험공간이다. 도자기 만들기와 한지 뜨기, 염색체험 등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얼마 전 공방 한 켠에 카페도 문을 열었다. ‘끌리움’이란 이름의 이 카페는 하늘강 공방의 감성을 닮았다. 각종 도자기 작품들이 내부를 가득 채워 포근한 느낌을 준다. 하늘강 공방과 끌리움 카페의 콜라보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다.

들꽃내에서의 농촌체험, 억새습지에서의 바람 힐링, 하늘강 아뜰리에와 끌리움에서의 유유자적, 이 모든 두메마을의 스토리텔링은 대청호와 어우러져 새로운 농촌마을 문화를 만들어 간다.

다만 이곳은 대청호 자체의 아름다움 측면에선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이 아쉬움을 달래줄 장소가 있다. 추동에서 대청호수길을 달려 두메마을 입구에 다다를 무렵 정자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이 정자 아래 오솔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면 대청호와 어우러진 마을 전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글·사진·영상=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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