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블루 호프·피렌체 다이아몬드, 니체·프로이트·릴케의 연인 '루 살로메', 스톤헨지 이야기

 

Ⅰ. 미스터리한 다이아몬드
현대 여성에게 보석 중의 보석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다이아몬드를 이야기할 것이다. 여성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만큼 다이아몬드에는 많은 전설이 있다.현재 다이아몬드 중 아름다움은 물론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다이아몬드로는 블루 호프, 리젠트, 피렌체, 상시 다이아몬드 4개를 꼽는다.

그러나 이 4개의 다이아몬드는 모두 저주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이들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인간의 탐욕과 살인사건,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20여 명 이상의 죽음과 관계된, 아름답지만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호프 다이아몬드는 푸른빛을 띠고 있어 ‘대양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며 영화 〈타이타닉〉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112.5캐럿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45.52캐럿으로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2. 니체, 프로이트, 릴케의 공통점 
철학자 니체와 시인 릴케,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들과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인 프로이트까지 사로잡은 여인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루 살로메, 그녀는 당대 최고의 천재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었던 독일인 여성 작가로 남성들을 파멸로 이끈 마성의 여인이었죠. 그녀가 쓴 몇 권의 작품에서 루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지만, 정작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은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들과의 격렬하고도, 비정상적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삶과 사랑은 경이롭고 아름답다. 루는 자신의 빛나는 지성과 빛나는 미모로 당대는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남자들을 사로잡았고, 결코 그 남자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지 않았던 빛나는 독립심으로 인해 '누구의 연인' 대신 '루 살로메'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스물한 살의 루가 서른여덟의 니체를 만났을 때, 그녀는 파울 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결혼이나 섹스가 없는 순수한 의미의 동거라는 전제에 대해 레가 합의했기 때문이다.

루-레-니체의 삼각관계 다음에 루가 선택한 것은 언어학자 안드레아스와 릴케였다.
안드레아스는 '플라토닉한 사랑'만 한다는 조건에 합의하고 루와 결혼했고, 이들의 결혼은 43년간 지속되었으며, 그 와중에 루는 릴케를 만났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릴케는 서른여섯인 루에게 열렬한 사랑을 바쳤고, 안드레아스는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릴케와 루의 로맨스가 지속된 것은 4년 정도였지만, 루는 릴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누이이자 연인이자 친구였다.

루가 프로이트를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쉰 한 살 때였는데, 프로이트가 주최하는 강좌에 나타나서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을 순식간에 매료시켰다고 한다.

루는 프로이트와의 관계에서도 그의 라이벌이었던 알프레드 아들러를 끌어들이면서 긴장감을 유지시켰다.
두 사람의 우정은 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루가 일생동안 섭렵했던 대단한 남자들 중 누구도 그녀를 온전히 가질 수 없었고, 온전한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결여는 창작의 욕구로 이어졌다.
아름다운 소네트로도, 인생의 비밀을 관통하는 철학으로도,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정신분석학으로도 정복할 수 없었던 여자. 언제나 끝없는 갈증을 더하게 했던, 고통과 절망의 심연을 맛보게 했던 여자, 그녀가 바로 루 살로메이다.

 

Ⅲ. 스톤헨지를 팝니다

솔즈베리 평원에 서 있는 스톤헨지는 1986년 이래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매년 백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그래서 잉글랜드의 가장 유명한 기념비적 건축물이 한때는 어느 변호사가 아내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사들였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부유한 미국인이 스톤헨지를 사들일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동기가 뭐였든지 간에, 100년 전인 1915년 9월 21일 세실 처브는 윌트셔주 솔즈베리의 경매에서 6,600파운드를 내고 스톤헨지를 낙찰받았다. 그에 의하면 즉흥적인 기분이었다고 한다. 처브의 아내 메리는 이런 낭만적인 결정에 별로 감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오늘날 가치로 680,000파운드에 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톤헨지 큐레이터인 헤더 세비어는 ‘메리는 세실이 경매에서 커튼 세트를 사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다른 걸 사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했다. 1차 대전이 끝나기 16일 전인 1918년 10월 26일, 처브는 스톤헨지를 공공에 증여했다. 이듬해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작위를 수여하여 처브의 너그러움을 인정했다. 처브는 스톤헨지 1대 준 남작, 세실 경이 되었다.

처브는 1876년 초라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톤헨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슈레톤 마을에서 마구와 안장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처브는 그래머 스쿨 (역자주 : 영국 중등학교. 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진학한다.)에 진학해서 교육실습생으로 일하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갔다. 변호사가 된 그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스톤헨지를 양도한 처브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양도 증서는 대중이 ‘1실링을 넘는 금액’을 지급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역 교회와 별도로 합의한 문서에는 지역 주민은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고 되어있다. 현재는 잉글리쉬 헤리티지에서 스톤헨지를 운영하는데, 인근 주민 3만여 명은 여전히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하지만 외부인은 성인기준으로 14.50파운드의 입장료를 낸다. 잉글리쉬 헤리티지는 지난 세기의 임금 인상률을 고려하면 당시보다 적은 금액이라고 한다. 1915년 스톤헨지가 매물로 나왔던 이유는 에드먼드 안트로부스 경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안트로부스 경은 1820년대 이후 스톤헨지를 소유했던 가문의 유일한 남자 후계자였다. 근위대 중위였던 그는 1차 대전 초기인 1914년 벨기에에서 전사했다.

처브가 스톤헨지를 사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에는 아내에 대한 애정이나 좋을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 못지않게 이 슬픈 이야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세비어는 ‘인근 지역 출신인 처브의 마음속에는 향토심이 강했던 것 같다. 처브가 안트로부스 가문 사람들과 알고 지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경매에 앞두고, 부유한 외국인이 스톤헨지를 사들여 분해한 후 외국으로 가져갈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500여 년 후 런던 브리지가 애리조나로 운송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처브가 사들였을지도 모른다. 스톤헨지의 성직자 프랭크 소머스는 ‘처브가 좋은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스톤헨지를 돌려주고, 스톤헨지의 유산을 규제 없이 무료로 즐길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처브는 1934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존 처브 경은 1957년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준 남작 작위가 끊겼다는 뜻이다. 오늘날 세실 처브 경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가 나고 자란 슈레톤 마을의 집에는 명판이 걸려있다. 스톤헨지 인근은 2천7백만 파운드짜리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인근 고속도로가 폐쇄되었고, 스톤헨지 관광객센터와 주차장이 이동되었다. 스톤헨지를 둘러싼 담장도 철거 중이다.

처브는 스톤헨지를 가능한 (대중에) 공개할 것을 양도증서에 명시했다. 스톤헨지를 매입한 지 100년 후, 처버의 요구사항이 실현될 것 같다. 그러나 소머스는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가족들이 스톤헨지에 나들이를 나오곤 했어요. 보름달 아래에서 연인들이 만나기도 했고요. 아이들을 고대 신비의 돌을 만지며 돌아다녔고요. 성직자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지역 행사를 진행했고요. 스톤헨지는 선의를 가지고 방문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영감을 줄 거예요. 스톤헨지는 진실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대의 삶 속에서 우리는 진실성을 잃어버렸지요.’ 

‘일 년에 여러 번씩 스톤헨지를 찾곤 했어요. 언제 봐도 인상적이에요. 처브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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