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취재부국장

객관적인 전력이 열세여서 경기나 싸움에서 질 것 같은 사람(팀)을 언더도그(Underdog)라고 한다. 반대로 이길 것 같은 사람은 탑도그(Topdog)라며 대척점 상부에 세운다. 뉘앙스가 마치 탄식조(歎息調)로 난무하는 우리네 수저계급론을 닮았다. 관중은 언더도그를 응원하기 마련이다. 일종의 동병상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흔치 않은 언더도그의 반란에 박수와 격려를 보내는 것은 단언컨대 대리만족 때문이다. 그러나 ‘꿈과 희망을 선사’했느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느니 하며 뜨겁게 치켜세워도 뇌리에 남는 것은 없다. 정작 자신이 서 있는 결전의 현실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좀처럼 반란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절망의 사슬에 결박되기 일쑤니 말이다.

노력이 부족해서, 의지가 약해서, 타고난 실력이 달려서, 정성이 부족해서 밑에 깔려 산다면 제 탓이다. 요즘말로 루저라고 뭉개지고 그래서 평생 언더도그로 살아야 한다면 그 또한 제 팔자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의 한탄처럼 부모 잘 못 만나서, 나라 잘 못 만나서 고릿적 준엄한 반상(班常)에 포박돼 산다면 분통 터지고 억울할 일이다.

천박한 자괴감의 발로인지 전(錢)과 권력의 장벽에 부딪혀 실제 코뼈깨나 깨져 본 경험칙인지 알 수 없으나 어째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수저계급론이 절대군주 시절 박제된 반상(班常)과 닮은꼴로 다가온다. 어쩌면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처럼 돈과 권력이 세습되는 사회에서 ‘상놈’이라는 인격 모독적 표현이 금기됐을 뿐인지 모를 현재를 두고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헬조선’이라는 해괴망측한 신조어가 등장한 것은 아닌가 싶다.

Only One으로 살아온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시류에 우회적인 비수를 꽂은 게 지난여름 이야기다. 박 대통령은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언젠가부터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헬조선을 꾸짖었다. 그리고 지금 이 겨울 국민들은 금수저 문 탑도그들에 둘러싸여 국격을 오염시키고 민심을 공황상태로 치댄 박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이 게 나라냐’고 헬조선을 덧대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사람은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져도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을 것이라는 불확실하고 막연한 한 자락의 희망만 보이면 문지방을 넘어서는 법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최상위 금수저들이 싸댄 무엇으로 인해 끝 모를 암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암전에 희망을 지펴보겠다고 가녀린 촛불을 들고 선 이 땅의 국민들이 그 자체로 희망인 게 큰 위안이다.

이달 초 휴가차 잠시 태국엘 다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난 10월 13일 타계한 고(故)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을 향한 추모 행렬을, 검은 상복(喪服)의 길디긴 행렬을 목격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즉석에서 만들어 무시로 건네던 따뜻한 밥 한 끼와 식수, 주전부리에선 정감 그 이상의 무엇이 느껴졌다. 물론 상황은 다르다. 다만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검은 물결과 일국의 대통령에게 이제 그만 내려오라는 촛불의 물결의 다른 질감이 작심한 듯 끄집어내는 한 숨은 삼킬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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