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사회부장>
아파트 담장에 손수레를 대고 와플이며 호떡 같은 주전부리를 파는 부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부부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분들이라 손가락을 이용해야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요즘 부부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지금은 그 자리를 과일노점이 차지했고 옆으로 할머니 몇 분이 나란히 앉아 야채나 자반 좌판을 펼쳐 놓고 파신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둔 이웃 아파트 입구도 똑같은 풍경이다.

2-3년 전의 일이다. 퇴근 무렵 두 아파트 사이 횡단보도 주변으로 생선과 야채들이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양 나뒹굴었다. 싸움이 벌어진 모양인데 상황이 심상찮았다. 그 무렵 아파트 곳곳에 현수막이 걸렸고 심지어는 배수의 진처럼 노점이 서는 자리에 쇠사슬을 매달았다. 노점을 이용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이자 실력행사였다.

한 동안 잠잠해 평화가 찾아왔나 싶었는데 최근 들어 관할 구청의 단속이 엄한 눈치다. 

간혹 단속 차량이 골목길 순찰차처럼 느릿느릿 존재를 각인시키듯 오간다. 아파트와 관할구청 공동 명의의 현수막도 새로 붙었다. 역시 ‘노점을 이용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다. 단속이 강화된 후 구청 직원들이 사라져야 노점은 판을 벌인다. 이번엔 물리적 충돌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저렴하고 싱싱하고 덤도 챙겨주는지라 노점을 자주 이용하는 고객입장에서는 노점상들의 힘겨운 숨바꼭질이 딱하고, 할머니들의 굳은 손과 주름진 얼굴을 보면 마음이 찡하다.

혹은 불편하거나 혹은 늙은 노점상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점 때문에 아파트 값이 떨어지고 이미지가 실추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잡다하게 쌓아놓은 물건들로 인해 위험하다는 둥 인도를 점유해 통행이 어렵다는 둥의 노점상 내몰기식 명분도 썩 다가오지 않는다. 노점상이래야 이쪽저쪽 공히 4-5명이어서 난립한다고 볼 수 없고 대부분 할머니들인데다 좌판이 담벼락에 붙어 나름 질서도 있다.

상가 상인들이 세금도 내지 않고 자기 장사 방해한다며 노점을 고깝게 여기는 대목은 어떨까. 일리 있다.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콩 놔라, 밭 놔라’ 할 것은 못된다. 엄연히 세금 내는 사람이 노점으로 인해 영업에 지장 받으면 그 입장에서 열통 터질 일이다.

넓은 아량에서 본다면 (순수한 의미의)노점상들은 상가 상인들보다 약자다. 우리 사회는 이제 막 약자를 보호하는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른바 중소상인보호 쌍둥이법으로 통하는 유통법(유통산업발전법)과 상생법(대&#8231;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이 마련된 것도 그래서다. 비록 적잖은 숙제를 떠안고 있기는 하나 정치가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SSM(슈퍼슈퍼마켓: 대형유통기업의 직영 슈퍼마켓)을 규제하고 나선 것은 사회적 합의로 봐야 한다. 가진 자의 횡포 앞에 없는 사람들 보호하자는 민의를 등에 업은 사회적 합의 말이다.
따지고 보면 SSM도 꼬박꼬박 세금 내는 기업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입점 위치 등을 강제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이 홀대받는 데는 ‘힘’의 불균형이 있다.

억지 주장일지는 모르나 유통업계 먹이사슬 중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는 생계형 노점도 이런 시각에서 바라봐 주면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노점을 모두 구제할 수는 없다. 기나 긴 경기침체의 후유증은 자고 나면 새로운 노점을 만들었을 만큼 우리 사회의 노점은 차고 넘친다. 상인들과 노점상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화약고 위에서 위태로운 공존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른다. 노점도 먹고 살게끔 내버려 두라고 일반 상인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노점상 편드는 주장도 아니다. 다만 그다지 주변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 허리 휜 노파들의 좌판 정도라면, 조금의 피해가 있더라도 눈을 감아주는 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정이라도 그들의 쪽박은 깨지 않는 아량, 유통법과 상생법의 취지를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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