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작가/한국문인협회 이사

3월이 돌아왔다. 1960년 3월 8일, 우리 대전에서 민주화의 횃불을 든 의거가 일어난 지 올해로 57주년, 그 3월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대전시민은 이 3·8의거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3·8의거는 우리 현대사의 변곡점인 4·19를 촉발시킨 60년대의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런데도 올해 역시 대전시청 대강당에서 조촐하게 기념식을 치렀을 뿐 별다른 의미 없이 지냈다. 대전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충청인의 충절과도 맥을 같이해야 할 3·8의거인데도 점점 그 정신이 잊히고 역사 속에 묻히는 것만 같아 아쉽다.

3·8의거의 고장인 우리 대전이 보통시로서 충청과 맥을 같이하며 발전해오다가 광역시로 자리매김을 한 지 29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예전에도 대전은 충청의 도청 소재지로서 지방정치와 문화예술, 산업경제를 이끌어 왔다. 3·8의거도 그런 맥락에서 의식 있는 대전고등학교와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 분연히 일어난 민주화운동이었다. 이제 우리 대전은 인구 150만이 넘는 도시로서, 충청권을 넘어 행정복합도시 세종시를 품은 배후도시로서 전국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도시 세(勢)에 비해 더욱 강화·계승돼야 할 3·8민주정신은 마산이나 대구에 비해 매우 빈약하다.

대전은 역사가 깊은 도시다. 일제항쟁기에 도청을 대전으로 옮기면서 발달한 근대도시로만 알고 있지만 둔산 신도시를 개발할 때 발굴된 월평동의 선사유적지, 노은동의 역사박물관, 그리고 도안신도시 개발과정에서 나타난 뿌리 깊은 역사 흔적에서 보듯이 대전이 그냥 신생도시만은 아니다. 삼국시대는 백제·고구려·신라가 충돌하는 요충지였고, 조선시대 이후에는 송시열·송준길·박문수·신채호 등을 낳은 충효정신의 요람지요, 선비정신의 산실이었다. 역사와 함께 충과 효가 숨 쉬는 고장이다. 3·8민주화의거가 대전에서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도 대전은 주목받은 도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첨단과학 프로젝트에 의해 1973년 착공해 1978년 문을 연 대덕연구단지 개발로 일약 창조과학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기초과학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우주과학, 국방과학, 원자력 개발을 선도해온 도시였다. 그만큼 우리 대전은 자랑스러운 곳이며, 대전시민은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곳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대전은 국토의 중앙에 자리를 잡아 사통팔달하는 교통의 중심지인지라 호남과 영남을 수도권과 잇는 요충지요, 물가가 저렴해 시민들의 삶이 그만큼 편안한 곳이라는 장점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지방색이 엷어지며 호남과 영남에 비해 특징이 없어졌고, 바탕이 워낙 순박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한 성품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최근에는 수도권이나 영·호남에 비해 정치적으로 무대접, 아니 푸대접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면이 있어 유감스럽기도 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대전이 자긍심을 갖고 있는 3·8의거에 대한 평가와 그 인식 면을 살펴보면 서운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대전의 3·8의거는 대구의 2·28의거, 마산의 3·15의거와 맥을 같이하며 이 땅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횃불인 4·19혁명의 단초가 된 의거였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바뀌게 한 의거요, 올곧은 민주정신의 표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조명 되지 못하고, 관심도 약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가 수준의 기념일로 확실히 자리를 잡는 것도 아니고 마산과 대구에 비해 행사 규모나 예산 지원도 매우 열악하다. 3·8민주정신이 국민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것도 아니다. 대전시민, 특히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각성해야 한다고 본다.

기념식 당일 권선택 대전시장도 축사를 통해 “3·8민주화정신을 대전정신으로 승화시키자”라고 말한 바 있지만 이 3·8정신은 대전의 충효와 선비정신, 그리고 첨단과학을 선도하는 창조과학 정신과 함께 융합돼야 한다. 3·8민주의거 기념관도 서둘러 세워져야 하고, 대구의 2·28공원과 같은 규모의 민주항쟁과 나라사랑정신을 기릴 공간도 조성해 향후 대전을 이끌어갈 대전정신으로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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