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그곳에가면 ... 호반 낭만길] 대전 동구 추동 바람의 언덕 (4구간)

은색과 갈색으로 빛나던 갈대와 억새는 이젠 색이 바랬다. 겨울이란 옷을 벗어 던지라고 재촉하듯 바람이 매섭게 불지만 봄이란 옷을 입을 준비에 한창인 대청호는 이제 막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겨울과 봄 그 어딘가의 대청호는 그렇게나 눈부시다. 마지막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차가운 바람만이 불지만 바람의 언덕에선 대청호를 어루만지는 따사로운 손길, 단지 그것에 불과하다.

 

#. 새벽녘에 만난 몽환경

일출전, 은은한 수묵화처럼 담백
해뜨면 화려한 파스텔화로 새 옷
마주한 풍경의 감동은 두배 이상

 

◆ 해를 머금은 대청호, 그 아름다움이여…

겨울이 가고 새 생명이 곳곳에서 돋아나려는 숭고한 3월의 마지막을 시기하는 꽃샘추위가 마냥 밉진 않은 때, 그때의 대청호에서 일출이 궁금했다.

어둠에서 빛으로 변하는 순간의 대청호는 장관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대청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에 있는 대청호반자연생태공원에서 북쪽으로 200여m를 가면 갈대와 억새로 유명한 추동습지보호구역이 나온다. 바람의 언덕까진 멀진 않다.

사실 바람의 언덕은 공식 명칭이 아니다. 대청호 이정표엔 전망 좋은 곳이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대청호의 바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라 해 이렇게 부른다.

 

 추동습지보호구역에서 갈대와 억새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가을에만 생기를 찾는 갈대와 억새는 어깨가 축 처진 우리네 아버지처럼 색은 바래고 고개는 뭐가 그리 슬픈지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다 보면 자신의 생기를 다른 이에게 나눠줬는지 꽃엔 건드리면 툭하고 터질 것 같은 아가 얼굴 같은 망울이 올라온다. 그렇게 청록의 색은 스멀스멀 다가온다.

그리고 잘 포장된 도로는 끝나고 본격적인 트레킹코스가 시작된다. 코스를 따라 걷는 데 큰 무리는 없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어둠 속의 대청호를 바라보고 그 위를 도화지에 뭘 그려 넣을지 방황하는 손처럼 대중없이 날아다니는 이름 모를 새의 소리를 들으며 발을 떼다 보면 어느새 바람의 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발걸음을 멈추고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형태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각인된 적 없는 용과 해태가 신성하단 걸 아는 것처럼 아름 보이는 형태만으로도 바람의 언덕은 분명 굉장한 광경을 보여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추동습지보호구역에서 발걸음을 인도하던 갈대와 나무가 경복궁의 수문장처럼 길 양옆을 호위한다. 갈대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 정면에 보이는 바람의 언덕이 보이는 순간 비록 구름에 가리긴 했지만 해가 뜨기 시작한다.

찬란한 붉은 화살이 바람의 언덕 중앙에 봄이 왔단 소식을 듣지 못해 아직도 붙어 있는 단풍이란 붉은 옷을 입은 나무에 비쳐 눈부심이 배가 된다. 눈을 찡그리지만 찰나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손은 눈썹 위로 자연스레 향한다.

장관이다. 일출을 더 자세히 보고자 바람의 언덕 안쪽으로 들어가면 해를 가리던 갈대와 나무의 호위가 끝나고 비로소 해가 완전히 나타난다. 그리고 어둠 속에 가려졌던 대청호가 위용을 드러낸다.

언제나 푸르던 대청호는 이 순간만큼 해를 머금고 붉은빛으로 치장했다. 평소의 푸른 대청호가 아니라 붉게 화장한 대청호는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다.

이름 없는 아기 새가 그 아름다움을 샘내듯 대청호에 비친 해를 지나가며 해를 지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지울 수 없으리….

아기 새의 심술에 고요했던 물결이 일순간 일었지만 이내 대청호는 침착하게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 순간의 고요가 영원하길 바라며 해를 마주보고 벤치에 앉은 뒤 붉게 치장한 대청호를 조용히 바라본다.

 

 ◆ 이름 없는 그 섬에 대한 미안함

대청호의 또 다른 모습에 취해 정신을 차리다 고개를 돌려보면 섬이 보인다. 저수량이 적었을 땐 직접 갈 수 있었겠지만 물이 차 있어 섬 같아 보이는 것들이다.

다도해(多島海)가 아니라 다도호(多島湖)라 할 정도다. 하지만 남해에서 보이는 무인도처럼 삭막하진 않다. 섬마다 중앙에 푸른 나무가 떡하니 자릴 잡아 제법 대청호를 꾸며준다.

저 멀리 이름 없는 섬엔 자신을 봐 달라 시위를 하는 것인지 휑한 가지의 세 그루의 나무가, 다른 이름 없는 섬엔 아직 오지 않은 봄의 색을 입은 한 그루의 나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또 다른 이름 없는 섬들도 각자의 매력을 뽐낸다.

비록 이름은 없지만 그게 아쉬운 듯 각자의 섬들은 시선만으로도 지친 다리를 치유해 준다. 해를 삼킨 붉은 대청호와 아직은 봄이 오지 않은 앙상한 가지의 나무를 가진 이름 모를 섬, 벌써 신록이 내려앉아 푸르스름한 건너편에 위치한 충북 옥천 항곡리의 이름 모를 낮은 산이 제법 경치를 이룬다.
삼위일체의 절경에 흠뻑 취했지만 벤치에 일어나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리에 채찍질을 한다.

4구간은 피오르 해안과 리아스식 해안 같은 느낌이 번갈아 섞여 있어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아 보이진 않지만 초록의 상록이 콧속으로 들어옴을 느낀다.

그렇게 상록을 느끼며 바람의 언덕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바람의 언덕은 만 끝에 위치해 어딜 가든 시야에 들어온다.

 

햇살을 비스듬히 받은 바람의 언덕은 햇살까지 한 움큼 머금고 대청호 아래에도 있다. 바람의 언덕과 수면에 비친 바람의 언덕이 거울을 본 것처럼 대칭을 이룬다.

바람의 언덕이란 얼굴에 뭐가 묻었을까 한동안 대청호란 거울을 바라본다. 세상 모든 것을 반사하는 대청호의 또 다른 매력에 다시금 감탄하며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일출의 대청호를 마음껏 즐긴다.

주지육림의 삶을 꿈꾸는 이들조차 이 순간의 대청호는 무한한 감동이 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 순간 대청호란 거울에 아까의 아기 새와 친구들이 놀러 와 한동안을 신나게 논다.

대청호를 질투하던 아기 새를 보살피듯 대청호는 잔잔히 바람을 일으켜 준다. 그리고 아기 새가 만든 물결과 또 다른 물결로 아기 새와 놀아준다.

아기 새가 제풀에 지쳐 놀기를 그만두고 날갯짓을 시작할 때쯤 출발지인 추동습지보호구역으로 향한다. 다음의 대청호는 어떤 팔색조의 매력으로 반길지 궁금함과 신비함을 간직하고선.

 

#. 호반이 찍어낸 작품 하나

호수는 숨겨뒀던 화폭 펼쳐내듯
수면위 붉게 치장한 하늘 담아내
시선 닿는곳 잊지못할 장면 연출

 

총평★★★★★

일출 때의 대청호, 바람의 언덕은 소박한 장관을 보여준다. 날씨가 좋으면 모든 사물이 대청호에 비친다. 바람의 언덕엔 두세 개의 벤치가 동쪽을 향해 있어 일출시간을 맞춰 가면 편하게 일출을 즐길 수 있다.

출사하기에도 좋은 장소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든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바람의 언덕을 북쪽에서 바라보고 사진을 찍는 게 최고다.

구도에 따라 다른 느낌의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자. 이정표까지 친절하고 산책로도 잘 나 있어 초보자도 트레킹하기 좋다.

트레킹을 끝내고 대청호반자연생태공원에서 지친 다리를 풀어주자.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사진=노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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