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로 하나되는 지구촌을 꿈꾸다

우리 민족 정서의 기저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효(孝) 문화를 세계 나라에 전파하는 일을 일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삼은 이가 있다. 효 사상이 인류 평화를 지킬 가장 확실한 키워드라고 이 사람은 믿고 있다. 효는 곧 인성의 기초라는 경험철학에서 효 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뛰고 있는 이희용(66) 세계효운동본부 대표총재(세기스타·세기보청기 회장)를 만났다.

◆ 고난에서 배운 인생의 맛

이희용 세기보청기 회장의 고향은 경북 경산이다. 서너 살 즈음 어머니의 등에 업혀 대구로 이주해 청년시절을 보냈다. 대전과 처음 연이 닿은 건 45년 전의 일이다. 군복무를 위해 대전을 찾은 게 첫 계기였다.

“지금의 대전 둔산동과 갈마동 일원엔 당시 공군부대가 있었어요. 이곳에서 약 5개월가량 훈련을 받았죠. 당시만 해도 대전은 지금의 중앙로(대전역~옛 충남도청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대구에 비하면 낙후된 도시였죠. 그래도 음식 맛은 일품이었어요. 

대구에서 버스 타고 대전에 도착해서 먹었던 한밭식당의 달짝지근한 깍두기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이 깍두기김치는 전국 최초라고 해서 아주 유명했는데 이 깍두기김치가 제가 대전에서 인생 2막을 열 수 있게 인도하지 않았나 싶네요.”
 

군 제대 이후 이 회장은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불같은 나이, ‘청춘 낭만’은 사치였다. 

급한 마음에 집안 어르신을 찾아가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했다. 알루미늄을 가공해 냄비 같은 것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가 미래를 맡길 수 있을 만한 희망을 심어주진 못했다. 

그가 다음에 손을 댄 건 지인과의 동업으로 종이박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종이박스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니 수요는 넘쳐났다. 일감이 밀리면 한 달 내내 24시간 공장을 가동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금 회전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어음결제가 일반적이었던 터라 부도어음 발생이 많았고 그래서 돈을 꾸러 다니는 게 다반사였다.

“박스 만드는 공장이라야 반자동 기계 몇 대가 전부인데 대부분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 무척 고된 일이었어요. 손에 굳은살이 박여 칼로 벗겨내야 할 정도로 일을 했지만 만족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때 돈 400만 원에 공장(기계)을 인수해서 죽어라 일했지만 누우면 벽에 발바닥이 닿는 셋방에서 벗어나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것도 너무나 고달팠어요. 돌파구가 필요했죠.”
 

 

◆ 인생·꿈이 펼쳐진 무대, 대전

간절함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저 그렇게 흘러갈 것만 같았던 이 회장의 인생에도 기회가 찾아왔다. 우연찮게 ‘보청기’를 접하게 된 거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요놈 귀에서 요술 부린다”며 신기한 듯 관심을 보였고 이 회장은 여기서 뭔가 미래를 직감했다.

“장사가 되겠다 싶었죠. 처음엔 수입품을 판매하다가 나중엔 직접 만들어서 팔게 됐어요. 국산화를 해서 내 브랜드를 갖지 않으면 이 일도 오래하지 못할 것이란 직감 때문이지요. 그게 바로 지금의 세기보청기예요. 

보청기란 것이 작고 하찮아 보여도 굉장히 기술집약적인 사업입니다. 안경과 달리 보청기는 당시 전문화가 덜 돼 있어 기회의 문도 넓었습니다. 다만 시장의 요구가 다양해서 기술 수준이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시장에서 바로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R&D에 투자를 굉장히 많이 합니다. 지금은 수입품보다 기술경쟁력이 더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대구에서 시작한 보청기사업은 점점 규모가 커져갔다. 우리나라 경제의 중심인 서울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불확실한 서울보단 지방에서 먼저 입지를 다지기로 했다. 그래서 확장의 중심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대전이다. 말 그대로 사통팔달. 지방 공략의 거점으로 대전만한 곳이 없었다.

“당시엔 대구에서 광주에 가려면 대전을 거쳐 가야 했어요. 기차는 물론이고 대구-광주 간 버스도 없었다니까요. 강원도, 충북, 전라도에 접근하기 가장 편리한 곳이 대전이었어요. 그래서 근거지(대구)는 형님에게 맡기고 제가 대전에 둥지를 틀고 사업을 확장했죠."

◆ 언제나 가슴 먹먹한 그 이름 ‘어머니’

보청기 주 고객은 역시 노년층이다. 보청기가 효도선물로 각인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이 회장은 보청기의 이런 특성 때문인지 감동을 이끌어 내는 친절·서비스를 가장 강조한다. 품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매장을 찾는 노인 고객들이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이 회장에게 ‘효’는 삶에 대한 태도 그 자체였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공경심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 효는 자신의 어머니에겐 미치지 못했다. 사업으로 성공해 효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어머니는 그의 곁에 없었다. 아쉬움과 서글픔이 지금도 이따금 그를 괴롭힌다.

“선풍기가 흔했던 시절에도 선풍기 한 대 사드리질 못했어요. 어머니는 손부채만 쓰시다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살아계실 때 잘 해드리지 못한 불효가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겁니다. 지금도 잠자리에 들어 어머니를 떠올리면 베개가 흥건하게 젖을 때까지 눈물을 쏟습니다. 효도라는 게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데 너무 늦게 깨달은 거죠.”

 

◆ 세계 효의 날 제정, 인생의 꿈

이 회장의 또 다른 직함은 세계효운동본부 대표총재다. 2009년 창단과 함께 김형태 전 한남대 총장이 초대 총재를 역임했고 이듬해 바통을 이어받았다. 취임 이후 이 총재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통해 저변을 확대해 나갔다. 

비슷한 지향점을 가진 단체들과의 통합을 통해 역량도 강화했다. 지금은 효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다져온 박상도 공동총재와 권선택 대전시장 등 명예총재단, 장시성 대전효문화진흥원장 등 부총재단 등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로 효 문화의 세계화를 준비하고 있다.

“진요근 사무총장(효운동본부 설립자)과의 인연으로 효 운동을 알게 됐어요. 당시 진 사무총장은 유명한 가수였는데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연을 맺게 됐지요. 

진 사무총장은 ‘불효’라는 노래로 1991년 신인가수상을 받은, 가요계의 대표적인 효자지요. 대한민국 연예인 중에서 경로효잔치를 가장 많이 한 가수이기도 합니다. 결국 진 사무총장과 저는 ‘불효’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네요. 

아무튼 이 인연이 여기까지 와서 인생의 마지막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의미 있고 보람 있는 꿈이죠. 현재 세계 효의 날 제정을 목표로 전국 조직화를 위해 뛰고 있고 아시아권부터 효 문화를 전파해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효운동본부가 세계 효의 날 제정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한 건 2015년이다. 그해 7월 17일 대전시청에서 100만 서명운동이 시작됐고 전국으로 확산했다. 그 사이 효문화진흥원이 대전에 자리를 잡으면서 대전은 효문화운동의 메카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세계효운동본부의 해외 활동도 꾸준히 이어지면서 현재 5개국과 인연을 맺었다.

“박상도 공동총재님은 태권도와 새마을운동의 뒤를 이어 ‘효 사상’이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출 브랜드가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효 사상으로 인해 가족·세대 간 유대감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핵가족화와 맞물려 우리나라에서도 효 사상이 많이 와해됐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대전에서 우리 전통의 효 문화를 다시금 바로 세우고 이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효는 곧 인성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바로 선다면 올바른 인성이 풍족해지고 이런 인성들이 모인 공동체는 따뜻함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효 사상이 널리 퍼지면 세계 평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효는 지구촌의 반인륜적인 사회병리현상을 치유하는 ‘힐링’의 근원이라고 확신합니다.”

세계효운동본부는 현재 반기문 전 UN사무총장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한국의 효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효 문화의 세계화(세계 효의 날 제정 및 효 문화 유네스코 등재)에 있어서도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반 전 UN사무총장의 외교적 역량이 결합되면 세계 효의 날 제정을 통한 효 문화 진흥은 일대 혁신적인 기회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으로 세계효운동본부는 판단하고 있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전우용 기자 yongdsc@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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