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오랜 직장생활을 정년으로 마치고 연금생활자로 살다 보니 건강보험료에 민감하다. 연금소득은 직장생활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데 그간의 직장건강보험료보다 약간 적은 보험료를 납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녀의 직장건강보험에 피부양자가 되면 보험료를 따로 납부 안 하지만 연금소득이 연 4000만 원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라 해당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퇴직금을 일부 수령해 연금소득을 줄여 자녀의 직장건강보험에 올리기도 한단다. 일종의 편법이라 너무 좀스럽게 보여 그냥 지역건강보험으로 옮겼다. 오래된 집과 자동차 등을 점수화하다 보니 20만 원이 조금 안 돼 안도했다. 우리나라 복지제도 중 가장 자랑할 만한 제도이고 또 병원 출입이 잦은 아내가 그만큼 혜택을 받으니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 여겼다.

그런데 5월 건강보험료 납부고지서 청구금액이 50만 원 가까이 돼 어이가 없었다. 아니, 4월에 건강보험료 정산을 하면서 ‘건강보험 폭탄’이란 말들이 있곤 했지만, 수당도 없는 연금 생활자에게 이렇게 많은 보험료를 청구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싶어 화가 났다. 자동이체를 신청해 메일로 고지가 되는데 이번은 정산 보험료라 고지서를 보냈나 싶어 다시 고지서를 보니 내 이름이 분명하다. 그래도 건강보험공단에 알아봐야겠다 싶어 애써 주말과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 오전 9시에 전화를 했다. 내 주민등록번호를 대니 자동이체 대상자라 고지서가 발부된 적이 없단다. 그래 고지서를 다시 확인해 보니 올해 건강검진 대상자가 셋으로 나와 있는데, 나는 부양 대상자가 아내뿐이고 우리는 작년에 건강검진을 했다 하니,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냐고 한다. 그런가 하며 다시 고지서 겉면의 주소지를 확인하니 이름은 같은데 집 호수가 다르다. 나는 211동 1002호인데 고지서는 211동 202호 김영호다. 우편배달부가 이름만 보고, 내 우편물 여러 개와 함께 우편함에 넣었고, 나도 이름만 보고 크게 놀란 것이다. 아, 우연히 같은 라인에 이름이 같은 사람이 살다 보니 이런 착각으로 며칠 동안 괜히 걱정했구나 싶어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우연과 착각이 겹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형이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던 고향 집과 밭을 찾아봐야겠다며 대전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제 칠순을 넘긴 김성동 형이, 우리 현대사와 시국에 비분강개하며 2박 3일씩 통음(痛飮)을 하던 시절이니, 20년쯤 전이다. 내가 운전하며 그와 함께 충남 예산군 광시면의 옛집을 찾았다. 그가 어린 시절 굴곡진 현대사로 희생된 선친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외딴 오막살이집은, 이제 큰길에서 좀 떨어진 시골마을이 되었다. 그의 옛 집터에서 사는 산지기를 찾아, 집에 딸린 밭은 어쨌느냐고 다그치자, 늙수그레한 산지기는 말을 더듬으며 “마을이 생기며 작은 밭이 집 안의 텃밭이 되었다”고 어눌하게 말했다. 중간에서 말리기도 어려워 산지기가 내온 지적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해당 토지가 전(田)이 아니라 임야로 돼 있었다. 그러니까 성동 형이 살았던 옛집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마을에서 좀 외진 곳에 있어 지목(地目)이 임야로 등재된, 이른바 토지임야였던 것이다. 그래, “형 이곳이 밭이 아니라 임야로 등재돼 있는 걸로 보아 산지기 아저씨가 밭을 팔거나 한 건 아니네!”하며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형이나 그 산지기나 토지임야를 그냥 밭으로 알고 살았던 데서 오해가 생겼던 셈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연과 착각이 겹쳐 엉뚱한 오해를 하기도 하고 또 심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그런데 찬찬히 되짚어 보면 착각이 우연히 겹치면서 사태가 비화한 경우가 많다. 이런 허탈한 경험을 하면서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필요를 절감한다. 특히 지나친 자기 확신은 매우 위험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 중 우리 눈으로 확인 가능한 별은 7000여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내 눈으로 본 것만을 마냥 장담할 순 없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불완전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자신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는 정신만이 우리를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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