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봉 전 대전문인협회장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다. 밀밭에 벼가 나면 벼가 잡초이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밀이 잡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다. 산삼도 원래는 잡초였을 것이다.

싱싱한 잡초들을 만날 때마다 생(生)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음을 생각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떠올린다. 보도블록 틈새에 아무 허가도 없이 자라는 풀들을 본다. 지나는 사람들의 런닝화에 채이고, 구둣발에 채여도 끄떡없이 살아남는다. 실뿌리 하나로 혹한을 이겨내고 낮은 땅 기며 고귀한 삶을 살아가는 저 싱싱한 생명력 앞에 고개를 숙인다.

잡초는 아름답고 예쁘고 생명력이 강하다. 모진 비바람을 맞고 눈보라를 이겨낸 잡초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잎만 무성할 뿐 꽃이 야생에서 자라는 잡초의 그것만 못하다. 그들은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그뿐이랴. 잡초들은 자연의, 땅의, 안개의 친구들이다.

우리 살아가는 길에 실룩샐룩 엉덩춤 뿌리며 가면 발자국마다 잡초들이 생겨난다. 새 소리 밟고 오는 아침 햇살에 저 찬란한 생명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겸손한 햇살이 숨결 푸르게 달려옴을 느끼며 환희에 젖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머니 눈빛처럼 부드러운 달빛 속에서 그들이 나누는 사랑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인간도 본능적으로 바람기를 가슴에 지니고 태어난다지만 그들도 그럴 것 같다. 잡초들의 손짓에서 사계의 소리를 듣는다.

어울려 사는 세상이다. 잡초와 익초(益草)가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다. 잡초는 봄바람 훔쳐 먹다 딸꾹질하는 뻐꾸기와도 정을 통한다. 잡초는 온갖 시름 견뎌내며 겨우겨우 살아났지만 동물들이 배고프다 하소연하면 지체 없이 옷고름 풀어 젖을 물린다. 잡초를 뽑지 않고 적당히 놔두면 농작물들은 그것들과 경쟁하느라 성장이 한결 빨라진다. 그리고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병해충을 이겨낼 만큼 야생화한다.

우리가 먹는 식용식물도 원래는 잡초였었다. 잡초로 태어났지만 인간의 사랑을 받게 된 풀들은 식용식물이 되어 인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다.

등외품처럼 구박하듯 정을 주지 않았어도 저절로 왕대밭에 난 죽순처럼 튼실하게 자라고 있는 잡초를 어찌 홀대할 수 있으랴. 더위를 참지 못하고 할딱이는 잡초의 삶 속에서 젊은 날의 나의 자화상을 본다. 새우깡으로 사육당하고 있는 갈매기의 꿈은 무엇인가? 실컷 먹어보는 것인가. 실컷 운동해 보는 것인가. 실컷 사랑해 보는 것인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소중하다.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아버리면서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창조주의 뜻에 따라 그들도 지음을 받아 자기의 몫을 다하고 있는데, 단지 내 정원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없애려고 하지 않고 함께 살기로 마음먹는 순간 그들과의 싸움은 그 의미가 달라진다.

잡초도 비로소 가을을 완성하곤 만족의 미소를 짓는다. 아흔 살 노인 같은 잡초가 새파랗게 사랑을 쏟아낸다. 온몸으로 금빛 노을을 만들어내는 자연을 닮아 그렇게 푸르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의 탁한 바람 묵묵히 들이마시며 쉼 없이 맑은 바람 걸러내어 되돌려주는 나무들의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오늘도 그들은 자라고 있다.

꽃은 쉽게 피어도 아름답게 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잡초는 아니다. 고결하게 생을 마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 그들이 바라보는 하늘과 내가 바라보는 하늘은 같다. 서로 평등하다는 생각과 생명에 대한 존중으로 배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매일 사랑으로 들여다봐 주면 생기가 돌고 예쁜 모습으로 생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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