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내가 어려서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배우고 부른 노래 중에 ‘우리나라 좋은 나라’란 말로 끝나는 것이 있었다. 그 노랫말 속에는 좋은 나라의 조건들이 몇 개 있었다. 잠꾸러기가 없고, 거짓말을 안 하고, 서로 믿고 사는 데가 좋은 나라라고 돼 있었다. 그런데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잠꾸러기가 참으로 많았고, 거짓말도 많이 했고, 서로 믿지 못해서 의심의 구름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지냈다. 나이가 들어서 점점 더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이 노래에 나온 말과는 아주 다른 삶의 현장을 경험하고 내 자신도 그런 삶을 살게 되었다. 말을 믿지 못하여 몇 번에 걸쳐서 도장을 찍으라고 하고, 그것도 인감도장을 쳐야 하고, 심지어는 열 손가락의 지문이 다 나오는 지장을 쳐야 한다. 그것도 믿지 못하여 공증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불신이 가득한 사회였다. 노래와는 달리 좋은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조금 나이가 더 들어서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참말을 할 수 없는 사회나 나라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참말을 하면 벌을 받고, 삶에서 힘들고 고단하게 지내야 하는 삶의 현장과 사회 분위기. 그것은 참 슬프고 나쁜 현상이었다. 참말을 할 때는 쉬쉬 남이 들을까 봐 조심해야 하고, 때로는 목숨을 내어 놓을 각오로 비장하게 해야 하는 현상. 그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아주 가깝게는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더 가깝게는 이념갈등과 독재체제에서 연유한 것이지 않을까?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일본인이 다 된 척해야 하는 일제시대, 맘으로는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괜찮다고 말하고 좋다고 말해야 하는 독재시대.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면서 언제나 말조심을 하여야 하는 사회. 바른 말을 본업으로 하는 언론에도 재갈을 물려서 비뚤어진 말을 하여야 밥벌이가 온전하던 시대. 그런 시대와 사회와 나라가 곧 살고 싶은 괜찮은 나라요 사회요 시대라고 할 수는 없다. 집단이든 개인이든, 언론이든, 학문체계에서 참말을 못하게 하는 사회는 나쁜 것이요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생명논리를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논리, 그것은 곧 자유로움에 있다. 자유로움의 핵심은 생각과 말과 글의 막힘없는 펼침에서 나타난다. 그것을 좀 거창한 듯한 말로 표현하면,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다. 이것들은 곧 생각과 말과 글이라는 상징물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이렇게 자기를 나타내는 것은 생명의 본질이요 속성이다. 내가 그것과 다른 생각을 한다면 그 다른 것을 다른 말과 글로 표시하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것들과 같은 것이 나타나고, 다른 것들끼리 조화할 수 있는 길이 나타난다. 그렇게 하여 한두 단계 훌쩍 뛰어오르는 진보와 진화를 경험한다. 이것이 곧 창조세계다. 그러한 창조의 가능성을 막는 사회와 나라는 나쁜 사회요 나라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때가 참으로 길고 어둡게 깔려 있었다. 그런 때는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시기다. 이른바 인간의 살 권리, 곧 생존권과 인권이라는 것이 소멸되거나 억눌린 시대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로 낙인되고, ‘중국의 만델라’라 불리며 오랜 감옥생활을 한 류사오보(劉曉波) 씨가 고립된 상태에서 지난 7월 13일 저녁에 세상을 떠났다. 감옥에서 얻은 중병을 앓고 있는 그가 해외치료를 요구했으나 불허, 부인 류샤에 대한 장기간 가택연금, 사망 이틀 만에 화장하여 바다에 넣은 것은 매우 놀라운 슬픈 처리다. 그는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던 ‘천안문 사건’ 때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하였다. 시민의 정당한 요구운동에 함께 할 생각이었다. 부당하게 억압되는 일반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였고, 그것을 누르는 세력에 그는 말로 저항하였다. 그러한 일을 할 때는 언제나 비폭력의 방법으로, 말과 글로, 때로는 예술작품으로, 학문연구로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그가 그렇게 억압된 상태, 감옥에서 병을 얻고 죽어간 것에 대하여 무수히 많은 세계의 언론들과 지성들이 슬퍼하면서 비판한다. 그와 부인을 다른 나라에서 치료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된 것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인권을 무시한 중국정부에게는 큰 부담이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이라서 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가 되었든 생명권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체제는 비판받고 극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그런 다른 나라의 노력과 비판과 요청을 ‘국내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말로 거부하였다. ‘국내 문제’란 말로 모든 관심과 비판을 차단하려는 것은 나쁜 나라, 나쁜 정부의 단골 식단이다. 인권, 사람의 생명권에 대한 문제는 국경을 초월하는 인류의 공동관심 사항이다. 자기 나라의 어떤 상황이 되었든, 인권문제는 ‘국내 문제’로 축소될 일이 아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인권은 소중한 것인데, 더욱이 정치범이나 양심범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중국정부가 류사오보를 감옥에 유폐한 것과 병을 치료할 수 없게 한 것과 가족들에게 주는 고통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짓은 위대한 나라의 일도 아니고, 진보되고 진화한 나라가 할 일도 아니다. 그러한 일들이 단순히 중국에서만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모든 사회, 모든 나라에서 아주 예민하게 인권이 침해되는 일들이 있는가를 따지고 고칠 수 있는 흐름이 강하게 일면 좋겠다. 좋은 나라? 자유로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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