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봉 전 대전문인협회장

 

한여름 더위를 피해 폭포 앞에 선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흐르던 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폭포 앞에 서니 몸이 한기를 느낀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고 약관의 시절을 회상한다. 내 몸도 그때는 폭포만큼이나 강하고 유연함을 자랑했다. 무슨 일이든지 무서움이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꼬리를 문 잠자리만 봐도 배꼽 아래로 손이 가던 그런 건강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쇠도 부러뜨릴 만한 힘이 있었다. 대추방망이를 닮았다고 부러워하던 몸이었다.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남들처럼 폭포 밑에 섰다. 너무 추워 몸에 소름이 돋는다. 한여름 속의 한겨울이라니. 거침이 없다. 쉼 없이 줄기차게 쏟아지는 물줄기와 동행하니 마음은 하늘을 난다. 여름의 막바지에서 더욱 펄떡이는 초록과 조화를 이루는 자신을 발견하곤 기쁨의 미소를 짓는다.

물은 만물을 씻어 준다. 한동안 가뭄으로 나뭇잎들이 먼지를 뒤집어썼다. 한줄기 빗줄기가 나뭇잎들을 목욕시킨다. 몸에서 윤기가 난다. 그것뿐인가. 물은 만물을 길러 준다. 물이 없이는 만물은 살아갈 수 없다. 엊그제 산행에서 보았던 바위손은 바싹 말라 있었다. 죽은 듯이 가는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빗줄기를 만나면 금방 생기를 되찾는다. 바위손에게 명의는 바로 물이다.

산꼭대기에서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물은 계곡을 따라 실같이 흐르다가 차츰 내를 이루고, 계곡이 되고, 그러다가 강줄기를 만나면 강과 합해 흐르고 바다에 이르게 되는데 결코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없다. 인간처럼 지위를 높이려 애쓰지 않는다. 인간은 지위가 높아지면 마음까지 덩달아 높아져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물은 그렇지 않다.

물줄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점점 더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나무 뿌리를 만나면 나무에 물을 대주고 또 흐르면서 겸양의 도를 일깨워주는 물의 덕이야말로 자꾸만 높아지려다 떨어지는 우리들이 평생 깨우치고 실천해야 할 덕목이란 생각이 든다.

물은 세 가지의 덕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씻어내는 공덕과 만물을 키워내는 것, 그러면서 겸양하는 덕이 아닐까 한다. 거기다가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물은 정성스럽다는 것이겠다. 물은 나로 하여금 아주 정직함을 경험하게 한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은 힘이 없는 듯하지만 돌도 뚫는 것은 끊임없는 정성의 힘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거기다 부드러운 물의 성품은 물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형체를 자유로이 하면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한다.

그런가 하면 서로 합할 줄도 알아서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져 있던 물줄기들이 언젠가는 하나가 되어 바다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산다는 것은 조용히 흐르다가 합쳐지는 것이라는 철칙 앞에서 나는 겸손해진다.

그것뿐인가. 물은 멈춰 있을 줄도 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방죽이나 저수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연잎이,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담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 없이 버리는 슬기를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 배워야 할 고가치의 덕목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크게 되기 위해서는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중국 나옹선사의 시가 생각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물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해탈을 꿈꾸며 읊조렸을 선사의 선시처럼 마음속에 한줄기 시원스러운 감로수와 같은 존재로 남는다. 팔불출 같은 생각은 무덤에 들어가서나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는 물 앞에서 경건함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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