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도세자의 얘기가 넘친다. 이런 유사한 얘기의 잔재는 지금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지대에 한 성(城)에 남아 있다. 물론 이 얘기에 얽혔던 독일 왕자는 우리의 사도세자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점은 좀 다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성은 1730년 바로 왕자와 왕자의 친구로 인해 빚어진 슬픈 이야기를 말없이 품고 있다.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 먼저 왕자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를 보자. 그에겐 장차 왕관을 이어받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프리드리히(1712~1786)였고 애칭은 프리츠였다. 빌헬름 1세는 군인출신이었다 보니 그런지 성격이 좀 과격했다. 거기다 이 왕의 아들 교육방법이 좀 기이했다. 이 왕은 아들 프리츠를 자나 깨나 꾸짖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놈 저런 놈 하면서 자주 구박까지 했다. 어떤 땐 게으름뱅이 건달이라면서 심하게 뺨을 때렸는가 하면, 두들겨 패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어느 날 이 왕은 아들을 때리면서 그의 신발에 입맞춤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였다.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정말 아들이 건들건들 했기에 그랬었는지? 좌우지간 이 부자 간의 갈등은 늘 깊어가고 꼬여가기만 했다.

왕 서열 1위인 프리츠가 드디어 18세 성인이 되던 해다. 그는 유사 시에는 아버지의 왕관을 물려받아야하는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생각을 품었는데 왕관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어찌해서든지 이 궁정에서 도망갈 궁리만을 했다. 이유는 충분하다. 아버지와의 끝없는 갈등에다가, 계속 구박만 해대는 아버지가 지긋지긋했던 거다. 그가 탈출해서 가고자 했던 곳은 바로 런던이었다. 외삼촌인 왕 게오르그 2세에게로 도망쳐 가면 아마도 삼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에서다. 그는 이 도망계획에 친구들을 끌어들였다. 한 사람은 카이트, 다른 한 사람은 카테였다. 평소에도 아주 친한 친구들로서 소위 말하는 누구와도 맞바꿀 수 없는 절친이었다. 평소에도 프리츠는 이 친구 둘과 밤을 세워 가면서 시, 예술, 철학, 수학, 신(神)에 관한 온갖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숙했을 뿐 만 아니라 피리 연주도 함께 했을 정도다.

1730년 초여름이었다. 아버지의 수행원들과 함께 그는 독일의 헤센주를 여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이 때를 그가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물론 여기엔 위에 언급한 친구 둘이 함께했고 말 두 마리까지 끌고 왔다. 근데 세상에! 누구의 고자질이었는지, 그만 이 음모(?)가 사전에 들통나 버렸다. 이렇게 되면 뻔하다. 도망은커녕 그 반대로 이제는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가 갇힌 곳에는 2명의 장교들이 밤낮으로 턱 버티며 지켰다.

평소에 성격이 과격하고 아들을 늘 구박했던 이 아버지는 아들의 도망 음모와 계획을 심문하는데 아랫사람에게 맡기지도 않았다. 그가 직접 나서서 이들에게 아주 엄한 심문의 잣대를 들이 대었다. 겁에 질린 프리츠도 처음에는 부정하면서 그런 도망을 계획한 적이 없었다고 발뺌도 해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너무나도 난폭하게 자기를 심문해대자 견디지 못한 그는 사실대로 입을 불어야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왕은 왕자를 마치 노예 다루듯이 ‘야비’ 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왕은 이런저런 심문을 하다가 격노가 치오르면 칼을 빼내 아들 목에 다까지 딱 갔다대기까지 했었다는 데, 마침 지혜로웠던 한 장군이 두 사람 사이에 엎어졌기에 피비린내 날 사건을 일단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왕은 아들을 쇠사슬로 묶게 했고, 프리츠와 동행하려고 했던 두 친구를 감옥에 쳐 넣으라고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다른 친구 카이트는 교묘하게도 홀란드로 도망을 가버렸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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