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대 교수

 

신정하의 ‘간사한 박파주야…’

간사(諫死)한 박파주(朴坡州)야 죽으라 설워마라
삼백년 강상(綱常)을 네 혼자 붙들거다
우리의 성군 불원복(不遠復)이 네 죽긴가 하노라

간사(諫死)는 ‘임금님께 간하다가 죽임을 당한다’라는 뜻이다. 박파주는 박태보가 파주목사(坡州牧使)를 지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박태보는 인현왕후의 폐비를 극력 반대하다 고문을 당하고 유배 가는 도중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삼백년은 조선조에서 숙종 때까지 300년 동안을, 강상(綱常)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 즉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도리요, 오상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5가지 기본 덕목을 이른다.

붙들거다는 ‘끝내 잘 지키어 내었다’라는 뜻이며 성군은 숙종 임금을 말한다. 불원복(不遠復)은 ‘머지않아 다시 복위시켰다’라는 뜻으로 인현왕후를 폐출했다가 복위시켰음을 이르는 말이다. 네 죽긴가는 ‘박파주 그대가 죽었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인현왕후 민비를 폐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임금께 간 하다가 고문에 죽은 박파주여, 죽음을 서러워하지 마라. 그대의 죽음이 조선조 창업 이래 300년 동안의 강상을 그대 혼자서 붙들어 지킨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 성군 숙종께서 얼마 아니하여서 복위를 시킨 것은 그대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의분강개(義憤慷慨)하는 젊은 선비의 외침이 가슴을 울린다. 숙종의 시퍼런 서슬에도 박태보를 구하려고 나선 사람이 바로 신정하다. 이 일로 파직돼 양천으로 내려가 은거생활을 했다. 얼마 후 조정에 복귀했는데 또다시 그는 박태보의 복관을 주장했다. 또 숙종의 노여움을 사 파면됐고 제주로 귀양을 갔다. 5년 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살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벼슬이 귀타 한들 이내 몸에 비길소야
건려(蹇驢)를 바삐 몰아 고산(故山)으로 돌아오니
급한 비 한 줄기에 출진행장(出塵行裝) 씻괘라

벼슬이 귀하고 좋다고들 하지만 어찌 이 내 몸 소중함과 비기겠느냐. 절룩거리는 나귀를 바삐 몰아 고향 땅으로 돌아오니 갑자기 쏟아지는 비가 속세를 떠나 돌아오는 행장들을 말끔히 씻어주는구나.

건려(蹇驢)는 ‘절룩거리는 나귀’, 고산(故山)은 ‘고향’을 뜻한다. 흔히 나귀를 탄 인물을 돌아다니는 시인이라 하여 ‘시객(詩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정하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노래한, 이제 막 속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이 담긴 작품이다. 이 외에 시조 한 수가 더 있다.

문인화가이며 평론가인 이하곤은 “평소 즐긴 것은 문장과 산수뿐이었으며, 책을 읽고 시를 짓는 것 외에 다른 일에는 얽매이지 않았다”라고 그의 평생을 술회했다. 문신인 송상기는 만시(挽詩)에서 “높은 명망 얼음인양 깨끗하였고 맑은 글은 옥처럼 티가 없었지. 벼슬자리 외물처럼 가볍게 보고, 글 쓰며 생애를 지나 보냈지”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소품 문학에 적극 대응해 척독(尺牘)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비평 방면에도 재능이 있었으며 장서가(藏書家)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유고로 ‘서암집(恕菴集)’ 30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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