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 편집국장

보릿고개가 있어 먹고 살기 어려웠던 70년대 초에도 인심은 살아 있었다. 들녘에서 새참이나 점심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이웃은 물론이고 낯모르는 이에게까지도 한 술 뜨고 가라고 식사를 권했다. 오히려 변변찮은 반찬과 음식을 대접하게 돼 미안하다고까지 했다. 이뿐인가 동냥을 다니는 사람을 보면 거의 쌀독이 비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냥 보내지 않았다. 또 끼니때 찾아온 방문판매 아낙네도 절대 선 입에 보내지 않았다. 폐 끼치기 싫다며 한사코 거절해도 소매를 잡고 대청마루나 평상에 앉히고는 했다.

2000년 여름 동해안 어느 해수욕장에서의 일이다. 친구 다섯 가족이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해변에 도착하자 남자들은 천막을 설치하느라 바빴고 여자들은 점심을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그때 초등학생이던 친구 딸이 해변으로부터 200m 정도 떠내려가는 위험천만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누구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거리였고, 해변에는 구조대도 없었다. 수영도 잘 못하는 친구가 딸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순간 인근에서 쉬고 있던 한 청년이 재빨리 친구 딸에게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청년은 무사히 친구 딸은 구해 우리에게 인계해 줬다. 그 후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를 도와 준 청년은 특수 수난구조 훈련을 받은 현역 군인 부사관 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우리는 고마운 마음을 음료수 박스로 대신했다.

자신이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우리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이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조는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희생정신을 가르쳤다. 남을 배려하는데 인색하지 않고 내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우리가 언제부턴가 변하고 있다. 전통사회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간미가 사라졌다. 최근에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 지면서 바로 옆에서 노약자 등이 치욕을 당하고 있어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하철에서 발생한 할머니 폭행 사건이 그렇다. 사건의 발단은 지하철에서 한 할머니가 엄마와 함께 있던 아이를 만지면서 시작됐다. 할머니가 아이를 만지자 엄마가 내 새끼 왜 만져 만지는 것 싫다고 소리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페트병으로 할머니 얼굴을 폭행했다. 그리고 나서도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고 했으면 알았다고 하고 입 다물면 되잖아 라고 말하는 등 막말을 이어갔다. 80대 할아버지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지하철에 타고 있던 80대 노부부 중 할아버지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젊은이의 다리를 실수로 건드리면서 발생했다. 젊은이는 다리를 왜 쳐. 경찰서 가자고 협박하고 욕하고 다음 역에서 내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과정을 지켜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도와주는 시늉만 했다.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은 욕하고 폭행한 사람도 나쁘지만 보고만 있고 도와주지 않은 지하철 승객들이 더 나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이런 일이 빈발하자 우리나라에서는 영원히 필요 없을 것처럼 보였던 ‘착한 사마리안법’ 도입 논란이 일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은 예루살렘 근처에서 강도를 당한 사람을 보고도 제사장은 그냥 지나가지만 그들에게 멸시당하며 사는 사마리아인이 구조해 준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상황에서 구조 불이행(Failure-to-Rescue)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다. 구조거부죄 또는 불구조죄라고도 한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불구조죄를 법으로 정한다고 해서 구조불이행이 사라질 것인가. 아닐 것이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 본 척 할 것이다. 내 부모가 내 형제자매가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착한 사마리안법 없이도 위험에 처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낯모르는 이를 망설임 없이 도와주는 사회분위기와 공감대 형성이 아쉬운 때다. 모든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보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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