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열정·도전으로 무장한 그녀, 업계를 리드하다

 

여성 기업가로 산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녹록지 않은 일이다. 유리절벽이란 말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남성기업가들과 경쟁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다. 여기 그 치열한 현실과 마주한 한 여성 기업가가 있다. 한 집안의 며느리에서 시아버지의 배려 속 가업을 잇는 CEO가 된 그녀는 유리로 된 절벽을 넘어 튼실하게 기업을 키워내고 있다. 지역사회에서 여성 경제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는 ㈜보문의 이종애(63) 대표. 경쟁을 넘어 ‘겸손과 조화’를 강조하는 이 대표의 특별한 삶의 철학은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 양품점에서 어머니 일 돕다…‘며느리에서 CEO로’

이 대표는 지난 1972년 대전의 한 여고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대신 양품점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도왔다. 당시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양품점을 하던 어머니의 경제력으로는 6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대학교육까지 시키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이 대표는 대학 대신 어머니의 일손을 보태며 젊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의 친구 한 분이 양품점을 찾았다. 남북전업사 창업주였던 고(故) 이은호 씨였다. 그는 ‘부모를 도와 일을 슬기롭게 처리하는’ 이 대표를 눈여겨봤고 그런 이 대표를 며느리 감으로 점찍었다. 이 대표는 당시의 인연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아버지와 친구이셨던 시아버님께서 어머니 일을 돕는 저를 예쁘게 보고 며느리로 낙점했던 것 같아요. 저의 부모님 역시 남편을 좋게 봤고 남편과 저도 서로를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결혼 후 이 대표는 두 명의 아이를 낳고 육아에 전념했다. 여느 주부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이었다. 그런데 둘째를 출산한 지 두 해가 지나던 날 시아버지 이 씨는 ‘회사 일을 도와달라’며 며느리 이 대표를 회사로 출근시켰다. 그리고 은행 업무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 거래처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까지 이 대표를 데리고 다니며 정성스레 가르쳤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일에 대한 재능’을 눈여겨 보고 그 재능을 키워주려는 생각이었다.

이 대표는 “시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은행 업무일 등을 배워나갔고 시아버님을 따라다니며 경제인과 거래처 관계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 대표는 시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배운 경험과 교훈들을 마음에 새겼다. 특히 겸손과 원칙, 그리고 배려를 골자로 한 여러 조언들은 이 대표의 삶에 있어 중요한 철칙이 됐다.

“시아버님은 항상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에 가면 지점장실에 먼저 들어가지 말고 창구에서 일을 본 후 그곳을 거쳐 들어가게 하셨죠. 혹여 창구 직원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염려하신 것 같습니다. 시아버지는 직원들의 급여를 연체하는 일이나 은행 결제가 늦어지는 것은 면(面)이 안 서는 일이 아니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철칙으로 생각하고 지켜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았다. 그 시아버지에 그 며느리다.

#. 위기에서 시작된 경영자의 삶,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을 기록하다

지난 1984년, 탄탄대로였던 남북전업사가 설립 30여 년 만에 부도를 맞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위기 앞에서 이 씨는 며느리에게 뜻밖의 당부를 한다. 사업 대표를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아들은 사교적이지를 못하니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대신 며느리가 대표를 맡아서 회사를 꾸려나가라”라는 취지로 기억한다.

시아버지 말씀에 따라 대표를 맡게 됐다. 당시 상황은 어두웠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 용기의 바탕이 된 것은 경험이었다. 이 대표는 “시아버님 밑에서 일한경험이 있어 겁나지 않았습니다.”고 말했다.

그렇게 바통을 받아 사업을 이끌어 가야 했던 1986년의 경영환경은 쉽지 않았다. 경영의 출발점에서 수억 원의 빚은 큰 짐이었다. 이 대표는 “처음 기업대표를 받았을 때 마이너스 5억 원의 빚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5억 원의 빚은 가벼운 숫자가 아니었고 힘들었던 적도 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 대표는 3~4년 만에 큰 빚을 갚았고 사업 2년 차가 될 때는 공장을 설립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단기간에 이뤄낸 희망의 결과, 비결은 무엇일까.

“남편과 같이 늦은 밤까지 작업을 했고 모든 원자재를 직접 구매하러 다니며 원가를 절감한 것이 비결 중 하나였습니다. 이전 회사가 무너졌던 것이 자금력 부족이었는데, 시아버님과 인연을 맺은 많은 이들이 나서 도움을 줬어요. 셋방살이 공장을 하지 말라며 공장자리를 가질 수 있게 도움을 준 이도 있었지요. 이 많은 것들이 시아버님이 남겨준 자산이었습니다.”

지난 1990년 12월 18일, 이 대표는 보문전기주식회사 법인(현 ㈜보문)을 설립한다. 시아버지가 일궈놓은 남북전업사의 유산을 밑천삼아 ㈜보문은 폐쇄형 수배전반을 생산해 내는 전문업체로 성장해 갔다.

“한국에너지관리공단의 고효율에너지기자재인증과 한국전기연구원(KERI)의 폐쇄 수배전반에 대한 개발시험을 성공적으로 완료해 기술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또 우수EQ(우수 단체 표준 품질), ISO9001(품질 경영 시스템),ISO14001(환경 경영 시스템)인증 등을 획득했어요. 웹기반의 전자화 배전반을 생산해 간편하고 편리한 운영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보문은 지난 2006년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 연구개발전담부서를 등록하는 등 연구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그해 기술혁신형중소기업으로 우뚝 섰다.

#. 이 대표가 말하는 여성 CEO의 역할과 책임

㈜보문은 지난해 대전지역 유망중소기업으로 선정되며 지역사회에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이 대표는 더 넓은 꿈을 꾼다. ‘특수분야 개척’에 대한 기업가로서의 비전을 이야기하며 말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사업시장이 좁습니다. 태양광 등 특수화된 분야에 성과를 내기 위해 도전하고 있어요.”

지난 2009년부터 신재생 에너지 전문기업에 등록하는 등 새로운 분야의 개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이 대표는 공부에도 열심히 매진하고 있다. 그 이유가 있다. “저는 결혼하기 전 대학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하는 틈틈이 공부를 했습니다. 그 뒤 석사학위를 따기 위해 한 대학에서 국제통상 부문 공부를 했습니다.”

이쯤 되면 ‘슈퍼맘’이다.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무엇보다 가업을 이어받은 기업인으로 살며 학업에 대한 열정까지 놓지 않은 그는 지난 2001에 행정대학원 최고관리과정을 취득했고 이후 고려대 대학원 국제통상 석사와, 한밭대 창업대학원 창업학과 석사를 받는 등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까. 이 대표는 “직원들의 공부도 100% 지원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지난 2004년 한국여성경제인협회 대전·충남지회의 지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지역사회의 여성경제인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지난 3년간 지회장으로 활동하며 국내 여성경제인협회 회장단들과 세계무대를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한국 여성 기업인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어요. 당시 여성기업특별지원법이 만들어져 여성기업인들이 좀 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된 것은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고 술회했다.

이 대표는 여성 CEO로 갖는 역할과 책임에 대해 강조했다. “저는 여성회장을 할 때부터 여사장들에게 이름이 사장이 아니고 실질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은행 돈을 빌리려면 재무제표에서 연체 등이 깨끗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대표는 중소기업인 대회 모범중소기업인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2004년)하고 모범여성경제인으로 정무장관 표창(1997년)을 받는 등 모범경제인으로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대표는 젊은 세대에게,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뼈있는 조언을 던졌다.

“젊기에 외형적으로 가꾸고도 싶은 마음이 있을 겁니다. 자기를 내보이는 것을 조금 지양하고 실력을 쌓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해냈고 또 해내고 있다.

글 곽진성 기자·사진 전우용 기자
 

㈜보문

유성 죽동로 81번지에 위치한 ㈜보문은 폐쇄형 수배전반을 생산하는 전문업체로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통해 명실상부 수배전반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세계 각국의 전시회에 참여하는 한편 태양광 등 특수분야 도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대전시 유망중소기업으로 선정돤 ㈜보문은 수요자의 요구에 눈높이를 맞추고 고객이 행복할 때까지 철저한 사후관리로 상생한다는 철학을 지켜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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