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축골 돌탑과 버드나무 [대전 동구 신촌동 '5구간']

스러져가는 노을이 빚어내는 선연한 열망 ... 당신도 물들고 있습니까?

저녁 노을이 명화를 그려낸다
그렇게 광대한 폭의 그림을
그려본 화가는 없겠지

감성충만한 붓터치처럼
붉은 빛들이 호반을 물들이면
돌탑과 버드나무는 한껏 황혼을 뽐낸다

물 바람 그리고 넘실대는 억새물결
어쩔줄 모를 절정의 순간이
대청호 오백리길 5구간 방축골에 있다

 

유명 가수 두 명을 주인공으로 한 방송에서 선배 가수가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며 후배 가수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해는 빨리 질까?”
“그러게요. 뭔가 슬프네요.”

그러곤 감성적인 말을 서로 나눈다. 도대체 노을은 무엇이기에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저 한없이 바라보게 될까.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이므로 산술적으로 노을은 100억 번이나 된다. 특별하지 않을 수준이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노을을 보면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

달그락, 달그락
안방에서 아내가 부스스한 눈으로 나오더니 짜증이 심히 난 목소리로 다그친다.
“뭔 소린가 했네. 아니 꼭두새벽부터 무슨 설거지를 하고 그래요?”
존댓말이다. 화가 났다는 신호다.
“아니, 뭐 이제 할 일도 없고 이제 아침준비 해야 할 텐데 당신이나 도와줄 겸해서….”

한없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선심 좀 써보겠다는 행동이 오히려 화를 불러 일으켰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네.”
“아이고, 아들 깼네. 미안해. 얼른 더 자. 것 봐요. 그냥 가만히 좀 있어요. 언제 이런 거 했다고. 내가 그냥 할게요.”

아내는 벌새의 날갯짓처럼 빠른 속도로 고무장갑을 뺐더니 설거지거리를 해치웠다. 그리고 곧바로 아침을 준비한다. 뭐 도울 거 없나 기웃거리지만 아내는 본체만체다. 오히려 짜증이다.

“돈이나 많이 벌고 명퇴했으면 내가 말을 안 하지.”
아내의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든다.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들 하는데 이런 느낌인가보다. 아내가 준비하는 아침상을 보니 죄다 아들놈이 좋아하는 반찬이다. 최근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식탁에 오른 적이 있던가. 강아지처럼 아내를 졸졸 쫓아다니다 하릴없이 아들녀석이나 깨우러 간다. 꼭두새벽부터 한 소리 들어서인지 아침상은 그저 불편하기만 하다.

“엄마, 나 어제 보너스 들어온 거 있어서 이따 계좌로 부쳐드릴 게요. 생활비로 쓰세요.”
“너 쓰기에도 부족할 텐데 뭘 그렇게까지 해? 괜찮아.”

서로 보기 좋은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는 결국 아들이 아내의 계좌를 받고 끝났다. 그리고 모두 출근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난 그냥 멍하니 소파에 앉는다. TV라도 켤까했는데 돈도 못 벌어오는 사람이 무슨 TV를 켜나 하는 마음에 책이라도 보는 척한다.
 

모두가 직장으로 나간 오전 여덟시, 나도 1년 전만 해도 여느 사람처럼 회사로 출근했을 텐데. 가족을 위해 해가 질 때까지 일하고, 해가 지고 나선 내 자리 뺏길까 상사 모시고 술 한잔하느라 하루가 짧았는데. 별의별 생각이 든다. 잡념에 사로잡힐수록 오히려 더 우울해지니 잡생각을 떨칠겸 청소기를 집어 든다.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걔고 점심을 스스로 차려 먹은 뒤 커피도 한잔하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담배 생각도 간절했으나 책잡힐까 명퇴 이후 끊었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식후초는 불로초”라고 했는데 아쉽다.

그나마 취미생활이나 해보겠다고 구입했으나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먼지만 앉은 카메라와 휴대전화만이 집에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는 자산이다. 오늘만큼은 집에서 청승맞게 굴지 말고 나가 보자란 마음에 카메라를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그냥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겠다는 심산이었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107번을 타고 종점에 도착하니 대전역이다. 회사 다닐 때 출장을 위해 지겹게도 이용하던 곳이다. 다른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고자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탔다.

목적지를 모르고 가니 ‘톰 소여의 모험’ 속 주인공 같은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너무 멀리 왔나 싶을 때 내렸다. 대청호의 구죽골이란 곳이다. 이런 곳도 있었나 하는 마음에 카메라를 고쳐 메고 걷기 시작한다. 조용히, 그리고 한참을 걷다 보니 제법 출사(出寫)한 사람들이 꽤 있다.

카메라도 가져왔으니 한 편에 자리 잡고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으니 잘 찍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전문가인척 폼을 잡아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나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가까운 곳에서 제법 장비까지 갖춘 나와 비슷한 동년배에게 묻는다.

“아저씨. 제가 처음이라 그런데 이거 잘 찍히고 있는 건가요?”
나도 아저씨인데 상대방을 아저씨라고 부르다니. 하지만 상대방은 싱긋 웃는다.
"제가 한 번 봐드릴 게요."

그리곤 내 카메라를 이것저것 만진다. 아저씨는 대화가 오랜만인지 내게 카메라 성능부터 가격, 최근 잘나가는 카메라가 무엇인지까지 알려준다.
“처음이시면 제가 잘 알려드릴 게요. 따라오세요. 조금만 가면 돌탑이 있는데 석양이 질 때 모습이 정말 죽입니다.”
 

얼마 만에 듣는 따뜻한 말 한마디인가. 웃으며 대답하곤 함께 사진을 찍는다. 상대방이 알려준 대로 찍어보고 내가 직접 찍고 싶은 구도를 찾아서도 셔터를 연신 누른다.
“아이고, 잘 찍으시네. 정말 처음 맞아요?”
칭찬 또한 얼마 만인가. 집에서 이제 짐짝 취급만 받았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져서 칭찬을 더 듣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더욱 열심히 노을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기 경치 정말 괜찮죠? 멋진 풍경에 붉은 노을까지 함께 하니 이런 곳도 많이 없습니다.”
렌즈에 눈을 떼고 슬슬 일어나 상대방의 말에 풍경을 한 번 살핀다. 가을에 가장 빛나는 억새, 대청호와 저 멀리 보이는 돌탑, 그리고 바람에 잎을 흩날리는 버드나무까지. 회사에 치이고 명퇴 이후엔 가족 눈치 보느라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이 있는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본다. 그리고 입을 뗀다.

“이렇게 노을은 관찰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회사 다닐 땐 노을이 지면 ‘이제 하루가 다 갔구나’란 생각만 들었는데. 이제 보니 울컥하고 슬프네요.”
“그렇죠. 노을이 일출보다 더 인상이 강하죠. 전 사진을 찍기 위해 일출을 꽤 접하긴 했는데 일몰의 노을만큼 와 닿지 않아요. 사람들도 노을에 더 감성적이 되죠.”

제법 친해져서인지 생각없이 뱉고 싶은 말을 한다. 뇌를 통해 거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생각만이 담긴 말.
“그냥 문뜩 든 생각인데 노을이란 게 그렇잖아요. 정해진 시간에 지는…. 시간이 되면 해가 지는데 우리 삶도 그렇잖아요. 때가 되면 삶도 지죠. 그래서 감정이입이 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해는 내일 다시 뜨지만 우리네 인생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슬픈 거 같아요.”

나도, 그리고 상대방도 서로를 향해 보지 않고 그저 넘어가는 해에 시선을 고정한다. 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결국 해는 산을 넘어가버렸다. 해는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해가 뿜는 붉은 빛은 캔버스에 그려진 파스텔처럼 부드러웠고 물감처럼 강렬했다. 그러나 그 강력함도 점점, 그리고 빨리 희미해져가고 있다.
 

“붉은 노을이네요. 이제 저것도 사라지면 오늘 하루가 끝인데 많은 생각을 들게 해요. 노을은 짧지만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잖아요. 내 삶도 저랬으면 좋겠어요. 언젠간 삶이 끝나는 걸 알고 잊히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만 저 노을처럼, 내 삶이 만들어 낸 어떤 것이 짧은 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 여운을 줄 수 있는 그런 거 있잖아요.”

두서없이 나오는 말이어서 나 스스로도 어떤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은 준비도 되지 않은 나의 말에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누군가라면 아무래도 가족이겠죠? 그런 말씀까지 하실 정도면 충분히 그런 거 줄 수 있을 겁니다. 여운 같은 거.”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린다. 아내다.
“어딘데 집에 없어? 빨리 와. 저녁에 당신 좋아하는 거 해놓을 테니까.”

존댓말이 아닌 반말이다. 아침의 따가운 말이 미안해서였는지 내 기분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그래. 누구처럼 멋진 인생은 아니어도, 남들에게 큰 영감을 주진 못해도 내 생의 붉은 노을이 가족에게 여운을 남기면 상당히 괜찮은 마무리 아닐까…. 나의 노을도 대청호에서의 노을처럼 아름답게 빛나길 바란다.

평점★★★★☆

방축골의 돌탑은 출사로도 굉장히 유명한 곳이다. 봄에는 작약꽃과 벚꽃, 가을에는 억새를 찍는 곳으로 이름이 나있다. 드넓은 대청호와 큰 버드나무, 돌탑이 석양의 붉은 빛을 머금을 때가 이 시기에 사진이 가장 예쁘다. 구도를 달리 할 때마다의 느낌도 모두 다르니 발을 열심히 옮겨 최고의 구도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근처 유명한 브런치카페도 있으니 출사 때 지친 허기를 달래기도 좋다. 다만 조금 비싼 건 감안하자. 최근 대청호의 수위가 높아져 돌탑까지 들어가기 힘들다는 점도 염두에 두자.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사진=노승환·김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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