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외친 숨은 주역들의 눈물

 

1987년 6월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정부를 향해 민주국가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소리쳤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권리, 독재 청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쳤다. 그 외침엔 세대의 구분도, 신분적 구별도 없었다. 그 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필사적이었을까. 

2017년 그 광장엔 자욱한 최루탄 연기대신 환한 촛불이 밝혀졌다. 항쟁의 기억이 없는 이들과 30년 전 항쟁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이 꿈꾸는 ‘그날’은 결이 같았다. 불의에는 정의로, 비상식엔 상식으로 맞서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질문에 ‘그렇게 세상은 바뀌었다’고 답할 수 있는 나라, 아직 1987년과 2017년이 꿈꾼 ‘그날’은 오지 않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1987’에 관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1. 외침…“호헌철폐, 독재타도”<1월 14일자 기사보기>
2. 대전의 6월을 이끈 보통 사람들
3. 1987년 미완의 ‘그날’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을 꿈꿨던 시민의 연대와 민주화를 향한 순수의 열망은 1987년 6월 29일 ‘민주화선언(시국수습안)’이라는 값진 결실로 이어졌다. 특정한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보통사람의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희생 뒤엔 또 다른 이들의 헌신이 있었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대전의 항쟁 대열 맨 앞에 서 있었던 허정길 씨와 박응수 열사가 그랬다. 6월 19일 오후 7시 30분부터 5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대전역 주변에서 자정까지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그 날, 한 남자가 버려진 버스에 올라타 학생과 시민을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허 씨였다. 그가 시민과 전경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경찰 저지선을 뚫기 위해 돌진하던 순간 버스 안으로 날아든 최루탄 때문에 핸들을 놓쳤고 이 때 진압을 위해 이동 중이던 박동진 일경과 충돌, 결국 박 일경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죗값은 달게 받아야하지만 허 씨는 정권과 언론에 의해 죄 없는 전경을 숨지게 한 악랄한 살인마, 술에 취한 버스 탈취범으로 매도됐다. 1987년 29세의 이 청년은 살인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 8·15 특사로 마흔이 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6월 항쟁에 참여해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전지역 조직국장으로 활동했던 박영기 씨는 “평범한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 앞에 우린 반성과 성찰로 하나가 됐어야 했다. 항쟁 이후 민주화 추진 동력은 급격히 상실됐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양김(김대중-김영삼)이 분열됐는데도 상황을 엄중히 인식하지 못했던 결과가 결국 오늘에까지 이어지게 된 셈”이라며 씁쓸해했다.

박 씨의 말처럼 6·29선언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7월 5일,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 씨가 세상을 떠났고 민주화 세력 분열로 어렵게 쟁취한 직선제는 군사정권에 합법적인 재집권의 문을 열어주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결국 또 다른 젊음이 몸을 던졌다. 1987년 12월 5일 대전역에서 한 청년이 “군부독재 종식, 양김 후보단일화”를 외치며 분신했다. 가구점에서 일하던 평범한 노동자 박응수(29) 씨였다. 그는 이송도중 숨졌다. 목숨을 내건 호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해 대선에서 군사정권에 의해 후계자로 낙점된 노태우 후보가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보통사람들의 항쟁이 ‘보통사람’의 가면을 쓴 세 번째 군사정권 탄생으로 귀결된 거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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